첨부 이미지

INDEPENDENCE FIGURE

인물

’15. 8월의 독립운동가 서상한

작성일 2015.08.05 조회 2,178 작성자 학예연구부

본문

일본 도쿄에서 폭탄거사를 추진한 서상한徐相漢

 

□ 공훈개요

 • 성 명 : 서상한徐相漢

 • 생몰연월일 : 1901 ~ 1967. 8. 29

 • 주요 공적

   1914년 대구고등보통학교 입학

   1918년 일본 유학

   1919년 도쿄노동동지회 활동

   1920년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결혼식과 일제 지배기구 폭파 계획

   1920년 금고 4년형 선고받음

   1924년 출옥

   1925년 형설회 가담‧활동

   1967년 사망

 •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 공훈설명

 

1.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다

  1920년대에는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의열투쟁이 거의 매년 일어났다. 1920년 4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학하던 서상한徐相漢의 의거는 1920년대 의열투쟁의 서막을 여는 것이었다. 서상한은 1901년 대구에서 서봉기徐鳳綺의 6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와 형제가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칠 정도로 민족의식이 높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부회장과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수창학교 교장과 사립측량 야학강습소의 소장을 지내는 등 이 시기 대구에서 계몽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형 서상락徐相洛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수료한 후 학교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1919년 중국 길림吉林에서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서상일徐相日도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2. 조선총독과 친일파의 폭살을 계획하다

  서상한은 아버지와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그는 1914년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여 수료하고, 1918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그만두고,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로 옮겨 공부하였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학비 조달이 어려웠던 그는 학비 마련을 위해 신문배달‧인삼 행상‧공장 노동‧우편배달 등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힘들게 공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1917년 1월에 노동자와 학생들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결성되어 활동하던 도쿄노동동지회東京勞動同志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1920년 1월에 이 조직을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로 전환하여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평소 친우들에게 “무슨 일을 한다 하면 나는 결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열의가 높았으며, 친우들로부터 두터운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1920년 1월 일제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일본 왕족 집안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가 4월 28일 도쿄에서 혼례를 치른다고 발표하였다. 일제는 일찍부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한국과 일본의 '동화同化'를 추진하였다. 그 상징적인 의미로 한국 왕족과 일본 왕실 사이의 혼인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애초 두 사람의 결혼은 1919년 1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할 강화회의에 두 사람을 파견하기 위함이었다. 일제가 영친왕과 마사코 부부를 신혼여행 중에 강화회의에 참석하면 한국과 일본이 동화되었음을 국제 사회에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결혼식은 연기되었다.

  서상한은 두 사람의 결혼을 일제가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고 식민지지배를 영구히 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사를 계획하였다. 계획은 혼례식장인 황거외원皇居外苑에 우편집배원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하객으로 참석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친일파 이완용에게 폭탄을 던져서 폭살시키고, 이어 일제 내무성과 외무성 및 경시청 건물도 폭파시킨다는 것이었다.

 

3. 의열투쟁의 정형을 제시하다

  서상한은 2월부터 거사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는 친분이 있는 일본인 학생 두 명에게 물고기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폭탄을 제조하도록 하였다. 폭탄은 초산칼륨, 유황, 타고남은 재 등을 배합하여 만든 화약을 양철통에 다져넣은 다음 도화선을 붙여 제조하였다. 서상한은 일본인 학생과 함께 왕자정王子町의 원야原野 및 용천瀧川 부근에서 물고기를 잡는 척하며 두 차례 성능을 실험하였다. 이어 거사 실행을 위한 여러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다.

  서상한의 거사는 일제에 사전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일제의 밀정으로 서상한에게 접근하여 거사 준비까지 도와주던 주오中央대학 재학생 신모申某가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 4월 11일 서상한은 피체되었다. 그의 거사 계획은 좌절되었지만, 일제의 심장부에서 조직의 지원도 없이 홀로 계획하고 추진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타격을 가하고, 일제 침략의 본거지를 폭파시키려 했던 의거는 일제에게는 충격을, 독립운동세력에게는 자극을 주었다. 아울러 그의 거사 계획은 이후 독립운동에서 의열투쟁의 선례이자 정형이 되었다.

  피체된 후 서상한은 일본인 학생 두 명과 함께 예심을 거쳐 6월에 재판에 넘겨져 징역 6년을 구형받았다. 7월 20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9월 22일 도쿄공소원控訴院에서 금고 4년을 언도받아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만기 출옥을 앞두고 1924년 5월에 감형이 되어 출옥하였다.

  서상한은 출옥 후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안동군 임동면 출신의 유진걸柳震杰‧이영실 등이 고학생동우회에서 활동하다가 탈퇴하여 조직한 고학생단체 형설회螢雪會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형설회는 1926년 일본 미에겡三重縣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발생한 충돌의 진상 파악과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일월회 등과 조사회調査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동흥노동동맹회東興勞動同盟會‧조선노동일심회朝鮮勞動一心會와 연합하여 민족의 공고한 단결, 민족의 완전한 해방, 민족의 국제적 평등을 목표로 하는 조선민중회朝鮮民衆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서상한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대한순국열사유골봉환회大韓殉國烈士遺骨奉還會 회장을 맡아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는 데 힘을 썼다. 이후 재일한국거류민단 등 재일한국인의 권익 보호에 힘써다가 1967년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1975년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참고문헌

『독립신문』

『동아일보』

경상북도, 『경북독립운동사』Ⅳ, 2013.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김창순‧김준엽, 『한국공산주의운동사』2, 청계연구소, 1986.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