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인터넷신문] 김대락 선생 추모학술 강연회 개최!

작성자 기획관리부 작성일 2008.10.22 14:17 조회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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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유인식(柳寅植), 김후병(金厚秉), 하중환(河中煥) 등이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려 하자 김대락은 문중의 원로와 함께 신교육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08년 매부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이 신문화를 수용하여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설립하자 이 무렵 생각이 크게 변화하였다. 

1909년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던 가산서당(可山書堂)이 학생 수의 증가로 인해 협소하게되자, 자신은 작은 집으로 물러나고 본 저택을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후 협동학교 운영에 앞장을 서 안동지방의 개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협동학교 교장을 맡았던 종손 김병식(金秉植)과 더불어 문중 개화와 혁신유림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김동삼(金東三), 이상룡 등 문중의 청장년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 망명을 계획하자, 그는 앞장서서 망명을 결단하고, 그 해 12월 24일 66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문중의 청장년을 비롯한 만삭인 손부와 손녀(평해 사동으로 출가)를 대동하고 서간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삼원포(三源浦) 이도구(二道溝)에 정착한 그는 1911년 5월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1911년 경학사(耕學社)와 1913년 공리회(共理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旨書)?를 작성하였다. 김대락은 만주망명 후 줄곧 이주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藍山)에서 작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이번 강연회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더 늘이고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토대가 되는 최고의 정신적 가치로서 우리들의 후손에게 물려줄 고귀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음을 기대하고 있다. 

 

*담당부서 및 담당자:기획관리부 오준민/이메일:mcp21c@naver.com/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