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에서 하얼빈까지] 만주로 간 안동 항일 명문가(4) (끝) 북으로, 북으로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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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에서 하얼빈까지] 만주로 간 안동 항일 명문가(4) (끝) 북으로, 북으로
안동레지스탕스, 사분오열 독립군 통합하다
題字 南軒 李尙培
봉오동대첩 등으로 고무된 독립운동, 경신년 대참변으로 5천명 희생 '타격'
석주 등 독립군 화합도모 끝까지 항거
오동·청산리대첩(1920년)이 끝난 뒤 일제는 북간도와 서간도에 산재한 독립군 군영과 마을, 민족학교를 초토화시켰다. 경신년 대참변이라고 일컫는 이 시기에 만주지역에 살던 한인 5천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다. 안동명가의 후예였던 추산 권기일도 봉오동대첩 후 일본군에 발각돼, 34세의 젊은 나이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인근 수수밭에서 살해됐다. 백하의 조카손자 김성로는 청산리전투에서 전사하고, 김동삼의 아우 김동만도 경신참변 와중에 일제에 학살됐다.
천전인들의 수난 소식을 접한 김장식, 김만식, 남자현(당시 47세)도 이때 만주로 망명했다. 삼원포 인근에 함께 살던 안동레지스탕스들은 일본군의 추적이 심해지자 일가별로 뿔뿔이 흩어진 채 후일을 기약하며 북만주로 떠났다. 김동삼·이원일 일가와 임은허씨 집안은 2천리나 떨어진 발해의 수도였던 목단강 영안현으로 떠나고, 석주 집안은 액목현 교하-화전현-반석현-서란현 등지로 옮겨 다니며 북상했다. 석주와 내앞마을 출신들이 초기에 개척했던 이 루트를 따라 이후 수많은 경상도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경상도인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3·1운동과 봉오동·청산리대첩으로 고양된 독립운동은 경신참변(1920)과 자유시참변(1921)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또 좌·우 사상대립으로 항일전선이 분열되고, 상해임시정부도 이승만의 독주로 파탄위기에 몰렸다. 1920년대 초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으로 만주 일대에 3부가 정립되면서 안동인들은 대부분 정의부에 몸을 담았다. 1925년 석주는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령으로 선출되고, 일송은 통의부, 남만통일회, 국민대표회, 전만대표회, 민족유일당촉진회 등의 의장으로 활약하면서 분열된 독립운동을 통합하는 데 온 정열을 바쳤다.
그러나 1930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만주에 있던 지도급 안동인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1931년 김동삼·이원일이 체포되고, 남자현도 고문 여독으로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1932년에는 이상룡이 눈을 감았고, 1933·41년에는 백하의 조카 김만식과 김정식이 세상을 떠났다. 1937년에는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2년에는 아버지의 유해를 만주에 묻어둔 채 안동으로 돌아온 석주의 장남 이준형이 자결하고, 이육사도 광복을 1년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일행들은 백서농장을 뒤로한 채 석주가 잠시 머물렀던 반석현 하마허자를 지나 지린(吉林)시로 향했다. 천리가 넘는 장정이다.
음 날 아침 일찍이 지린시를 떠나 이상룡이 운명했던 서란현 대북구 소과촌을 찾아 떠났다. 서란현은 시로 바뀌었으나 소과촌은 그대로다. 석주의 가족들이 이곳에 온 해는 1929년. 석주는 이곳에서 4년을 살다 75세에 영면했다. 당시 서란현 '소수민족지'에는 "이상룡이 늙고 병든 몸이 돼 더는 조선인들의 광복을 영도할 수 없게 되자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의사와 약품이 부족한 조건에서 선생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고 나와 있다. 석주의 손부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석주 어른께서 일곱달째 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종조부(이상동)께서 먼 길을 오셨다. 종조부가 어른을 보고 안동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어른께서 나 죽기 전에 여기를 못 떠난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씨나 떨어뜨리게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은 들어가라"고 기록돼 있다.
석주는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 독립이 되기 전에는 유해를 고향으로 가져가지 마라. 어느 때라도 광복을 하거든 유지에나마 싸다 조상 발치에 묻어라"고 했다고 한다.
석주가 운명한 뒤 석주를 따라 함께 망명했던 동생 이봉희(신흥무관학교 교장 역임)를 비롯한 석주 일가 70여명은 석주의 시신을 관에 모시고, 안동으로 귀향하던 도중 중국 군인들에게 돈과 귀중품을 다 뺏겨 소과촌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석주 일가 중 결국 장남 준형과 손자 병화 등은 안동으로 귀향하고, 동생 봉희와 조카들은 만주에 남았다. 석주는 서거 후 소과촌에 5년간 묻혀있다가 1937년 조카 이광민과 이광국에 의해 하얼빈 취원창으로 모셔졌다. 아이러니하게 독립이 되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석주의 유언이 죽어서도 지켜진 것이다.
스는 지린시가지를 벗어나 북쪽 베이산(北山) 방향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부여의 발상지였던 동단산이 보인다. 지린시 북쪽 교외는 쑹화(松花)강을 따라 석유화학공장이 줄지어들어서있다. 공장과 공장을 잇는 거대한 오수관이 주택가와 아파트 사이로 혈맥처럼 어지러이 얽혀있다. 2005년 지린시 화학공장 대폭발로 오염물질이 쑹화강과 헤이룽(黑龍)강에 유입돼 세계적인 환경재앙이 발생한 적이 있다.
지린시를 떠난 지 1시간30분. 버스는 이제 수란(舒蘭) 시가지를 벗어나 다시 헤이룽장(黑龍江)성 우창(五常)시로 가는 4차로 국도에 접어들었다. 이곳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의 경계지역이다. 다시 15㎞쯤 가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좁은 비포장 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에서 30분을 더 갔다. 후손들은 소과촌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내린 다음 걸어서 마을로 들어갔다. 소과촌 어귀 들녘에는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당시 소과촌에는 20호 남짓의 한인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100여 가구로 늘어났지만 동포는 한 명도 살지 않는다. 마을은 전형적인 한족마을로 비교적 깨끗했다. 소들이 길 양편에 누워서 한가하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한국인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석주일가가 살던 집은 찾을 수 없었지만 후손들은 마을 우물터가 있던 자리만 확인하고, 곧장 석주의 묘소가 있던 뒷산으로 향했다. 옥수수 밭 사이로 난 길을 500m쯤 지나자 석주가 묻혀있던 곳이 나온다.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묘소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후손들은 석주가 5년간 묻혀있던 곳을 향해 다시 묵념을 드렸다.
1920년대 말부터 안동인들은 하얼빈 북쪽 취원창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곳은 이상룡, 김동삼 등 정의부 지도자들이 북만지역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세우기 위해 미리 계획했던 지역이다. 1926년 이봉희·광민 부자를 필두로 이듬해 내앞 출신인 김정식과 월송 김형식 일가 등이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김동삼 일가는 목단강 영안현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 아성현 평방-상지현 하동 등지에서 살다 1933년 취원창으로 왔다. 취원창은 안동인들의 최종 정착지가 되었다. 취원창은 쑹화강을 따라 하얼빈 북동쪽 약 30㎞ 지점에 있다.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지대로 광복 전까지 1천명이 넘는 경상도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송은 당시 민족학교 교장을 하며 독립지도자를 양성했다. 이광민은 한족회와 정의부 간부로서 폭넓은 활약을 했다. 이들은 이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그들과 함께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로 명성을 떨치다 전사한 왕산 허위의 후손 허형식, 북한으로 간 월송 김형식(조선독립동맹 북만지부장), 이광국(북한에서 내무상 역임) 등이 바로 그들이다.
수란에서 취원창으로 가는 길은 망망대해와 같은 대평원이다. 헤이룽장성 경계를 넘어서자 흙 색깔도 검은 색으로 바뀐다. 취원창은 원래 아성(阿城)현 취원(聚源)향 구역이었으나, 1987년 아성시 취원현으로 바뀐 뒤 2006년 9월 다시 하얼빈시 다오와이(道外)구 쥐위안(巨源)진으로 편입됐다. 주소가 바뀐 만큼 취원창을 찾기란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것처럼 힘들었다. 하얼빈에서 2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쥐위안진 인민정부청사에서 후손들은 다시 걸어 석주가 53년간이나 잠들어 있던 묘소를 찾으러 나섰다.
이곳에는 석주 이상룡의 동생 이봉희와 조카 이광민, 석주의 당숙인 이승화가 함께 묻혀있었다. 이들의 유해는 국가보훈처의 노력으로 1990년 9월13일 고국에 봉환돼 현재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치돼 있다.
는 저물어가고, 길은 험해도 후손들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어른 키보다 더 자란 옥수수 밭 사이 진흙길을 50분이나 넘게 가도 묘 터를 찾을 수 없었다. 길은 미끄럽고 사방은 깜깜한데 모기들마저 극성을 부렸다. 다시 쥐위안진으로 되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서산 김흥락의 증손자인 김종성씨(57)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하면서 일행을 독려했다. 그는 맏아들 김형호씨(28)와 함께 이번 답사에 나섰다. 잠시 약해졌던 마음을 추스른 후손들은 마침내 선조들이 잠들어있던 공동묘지 터를 찾았다.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와도 이렇게 먼데 그들은 왜, 죽을 고초를 겪어가며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왔을까. 다행히 석주를 비롯한 일부 요인들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었지만 백하 김대락을 비롯, 만주에서 쓰러진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시신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후손들은 독립을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져간 넋들을 기리며 마지막 묵념을 올렸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오동·청산리대첩(1920년)이 끝난 뒤 일제는 북간도와 서간도에 산재한 독립군 군영과 마을, 민족학교를 초토화시켰다. 경신년 대참변이라고 일컫는 이 시기에 만주지역에 살던 한인 5천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다. 안동명가의 후예였던 추산 권기일도 봉오동대첩 후 일본군에 발각돼, 34세의 젊은 나이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인근 수수밭에서 살해됐다. 백하의 조카손자 김성로는 청산리전투에서 전사하고, 김동삼의 아우 김동만도 경신참변 와중에 일제에 학살됐다.
천전인들의 수난 소식을 접한 김장식, 김만식, 남자현(당시 47세)도 이때 만주로 망명했다. 삼원포 인근에 함께 살던 안동레지스탕스들은 일본군의 추적이 심해지자 일가별로 뿔뿔이 흩어진 채 후일을 기약하며 북만주로 떠났다. 김동삼·이원일 일가와 임은허씨 집안은 2천리나 떨어진 발해의 수도였던 목단강 영안현으로 떠나고, 석주 집안은 액목현 교하-화전현-반석현-서란현 등지로 옮겨 다니며 북상했다. 석주와 내앞마을 출신들이 초기에 개척했던 이 루트를 따라 이후 수많은 경상도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경상도인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3·1운동과 봉오동·청산리대첩으로 고양된 독립운동은 경신참변(1920)과 자유시참변(1921)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또 좌·우 사상대립으로 항일전선이 분열되고, 상해임시정부도 이승만의 독주로 파탄위기에 몰렸다. 1920년대 초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으로 만주 일대에 3부가 정립되면서 안동인들은 대부분 정의부에 몸을 담았다. 1925년 석주는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령으로 선출되고, 일송은 통의부, 남만통일회, 국민대표회, 전만대표회, 민족유일당촉진회 등의 의장으로 활약하면서 분열된 독립운동을 통합하는 데 온 정열을 바쳤다.
그러나 1930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만주에 있던 지도급 안동인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1931년 김동삼·이원일이 체포되고, 남자현도 고문 여독으로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1932년에는 이상룡이 눈을 감았고, 1933·41년에는 백하의 조카 김만식과 김정식이 세상을 떠났다. 1937년에는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2년에는 아버지의 유해를 만주에 묻어둔 채 안동으로 돌아온 석주의 장남 이준형이 자결하고, 이육사도 광복을 1년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일행들은 백서농장을 뒤로한 채 석주가 잠시 머물렀던 반석현 하마허자를 지나 지린(吉林)시로 향했다. 천리가 넘는 장정이다.
음 날 아침 일찍이 지린시를 떠나 이상룡이 운명했던 서란현 대북구 소과촌을 찾아 떠났다. 서란현은 시로 바뀌었으나 소과촌은 그대로다. 석주의 가족들이 이곳에 온 해는 1929년. 석주는 이곳에서 4년을 살다 75세에 영면했다. 당시 서란현 '소수민족지'에는 "이상룡이 늙고 병든 몸이 돼 더는 조선인들의 광복을 영도할 수 없게 되자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의사와 약품이 부족한 조건에서 선생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고 나와 있다. 석주의 손부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석주 어른께서 일곱달째 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안동에서 종조부(이상동)께서 먼 길을 오셨다. 종조부가 어른을 보고 안동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어른께서 나 죽기 전에 여기를 못 떠난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들어갈 수 없다. 씨나 떨어뜨리게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은 들어가라"고 기록돼 있다.
석주는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 독립이 되기 전에는 유해를 고향으로 가져가지 마라. 어느 때라도 광복을 하거든 유지에나마 싸다 조상 발치에 묻어라"고 했다고 한다.
석주가 운명한 뒤 석주를 따라 함께 망명했던 동생 이봉희(신흥무관학교 교장 역임)를 비롯한 석주 일가 70여명은 석주의 시신을 관에 모시고, 안동으로 귀향하던 도중 중국 군인들에게 돈과 귀중품을 다 뺏겨 소과촌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석주 일가 중 결국 장남 준형과 손자 병화 등은 안동으로 귀향하고, 동생 봉희와 조카들은 만주에 남았다. 석주는 서거 후 소과촌에 5년간 묻혀있다가 1937년 조카 이광민과 이광국에 의해 하얼빈 취원창으로 모셔졌다. 아이러니하게 독립이 되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석주의 유언이 죽어서도 지켜진 것이다.
스는 지린시가지를 벗어나 북쪽 베이산(北山) 방향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부여의 발상지였던 동단산이 보인다. 지린시 북쪽 교외는 쑹화(松花)강을 따라 석유화학공장이 줄지어들어서있다. 공장과 공장을 잇는 거대한 오수관이 주택가와 아파트 사이로 혈맥처럼 어지러이 얽혀있다. 2005년 지린시 화학공장 대폭발로 오염물질이 쑹화강과 헤이룽(黑龍)강에 유입돼 세계적인 환경재앙이 발생한 적이 있다.
지린시를 떠난 지 1시간30분. 버스는 이제 수란(舒蘭) 시가지를 벗어나 다시 헤이룽장(黑龍江)성 우창(五常)시로 가는 4차로 국도에 접어들었다. 이곳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의 경계지역이다. 다시 15㎞쯤 가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좁은 비포장 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에서 30분을 더 갔다. 후손들은 소과촌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내린 다음 걸어서 마을로 들어갔다. 소과촌 어귀 들녘에는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당시 소과촌에는 20호 남짓의 한인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100여 가구로 늘어났지만 동포는 한 명도 살지 않는다. 마을은 전형적인 한족마을로 비교적 깨끗했다. 소들이 길 양편에 누워서 한가하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한국인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석주일가가 살던 집은 찾을 수 없었지만 후손들은 마을 우물터가 있던 자리만 확인하고, 곧장 석주의 묘소가 있던 뒷산으로 향했다. 옥수수 밭 사이로 난 길을 500m쯤 지나자 석주가 묻혀있던 곳이 나온다.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묘소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후손들은 석주가 5년간 묻혀있던 곳을 향해 다시 묵념을 드렸다.
1920년대 말부터 안동인들은 하얼빈 북쪽 취원창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곳은 이상룡, 김동삼 등 정의부 지도자들이 북만지역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세우기 위해 미리 계획했던 지역이다. 1926년 이봉희·광민 부자를 필두로 이듬해 내앞 출신인 김정식과 월송 김형식 일가 등이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김동삼 일가는 목단강 영안현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 아성현 평방-상지현 하동 등지에서 살다 1933년 취원창으로 왔다. 취원창은 안동인들의 최종 정착지가 되었다. 취원창은 쑹화강을 따라 하얼빈 북동쪽 약 30㎞ 지점에 있다. 이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지대로 광복 전까지 1천명이 넘는 경상도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송은 당시 민족학교 교장을 하며 독립지도자를 양성했다. 이광민은 한족회와 정의부 간부로서 폭넓은 활약을 했다. 이들은 이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그들과 함께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로 명성을 떨치다 전사한 왕산 허위의 후손 허형식, 북한으로 간 월송 김형식(조선독립동맹 북만지부장), 이광국(북한에서 내무상 역임) 등이 바로 그들이다.
수란에서 취원창으로 가는 길은 망망대해와 같은 대평원이다. 헤이룽장성 경계를 넘어서자 흙 색깔도 검은 색으로 바뀐다. 취원창은 원래 아성(阿城)현 취원(聚源)향 구역이었으나, 1987년 아성시 취원현으로 바뀐 뒤 2006년 9월 다시 하얼빈시 다오와이(道外)구 쥐위안(巨源)진으로 편입됐다. 주소가 바뀐 만큼 취원창을 찾기란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것처럼 힘들었다. 하얼빈에서 2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쥐위안진 인민정부청사에서 후손들은 다시 걸어 석주가 53년간이나 잠들어 있던 묘소를 찾으러 나섰다.
이곳에는 석주 이상룡의 동생 이봉희와 조카 이광민, 석주의 당숙인 이승화가 함께 묻혀있었다. 이들의 유해는 국가보훈처의 노력으로 1990년 9월13일 고국에 봉환돼 현재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치돼 있다.
는 저물어가고, 길은 험해도 후손들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어른 키보다 더 자란 옥수수 밭 사이 진흙길을 50분이나 넘게 가도 묘 터를 찾을 수 없었다. 길은 미끄럽고 사방은 깜깜한데 모기들마저 극성을 부렸다. 다시 쥐위안진으로 되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서산 김흥락의 증손자인 김종성씨(57)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하면서 일행을 독려했다. 그는 맏아들 김형호씨(28)와 함께 이번 답사에 나섰다. 잠시 약해졌던 마음을 추스른 후손들은 마침내 선조들이 잠들어있던 공동묘지 터를 찾았다.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와도 이렇게 먼데 그들은 왜, 죽을 고초를 겪어가며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왔을까. 다행히 석주를 비롯한 일부 요인들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었지만 백하 김대락을 비롯, 만주에서 쓰러진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시신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후손들은 독립을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져간 넋들을 기리며 마지막 묵념을 올렸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담당부서 및 담당자:기획관리부 오준민/이메일:mcp21c@naver.com/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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