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락

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

김대락

작성일 2014.12.17 조회 607 작성자 학예연구부
성명
김대락
한자
金大洛
생존기간
1845~1914.12.10
출생지
임하면 천전리
활동분야
만주방면
훈격
애족장(90)

본문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중언中彦. 호는 비서賁西·백하白下. 출신지는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 260번지(현 임하면 천전리, 내앞). 1907년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이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려 하자 김대락은 문중의 원로와 함께 신교육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08년 매부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신문화를 수용하여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설립하자 그때부터 생각이 크게 변화하였다. 1909년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던 가산서당可山書堂이 학생수의 증가로 인해 협소하게 되자, 자신은 작은 집으로 물러나고 본 저택을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후 협동학교 운영에 앞장을 서 안동지방의 개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협동학교 교장을 맡았던 종손 김병식金秉植과 더불어 문중 개화와 혁신유림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김동삼金東三·이상룡 등 문중의 청장년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 망명을 계획하자, 그는 앞장서서 망명을 결단하고, 그 해 12월 24일 66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문중의 청장년을 비롯한 만삭인 손부와 손녀(평해 사동으로 출가)를 대동하고 서간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삼원포 이도구二道溝에 정착한 그는 1911년 5월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동년 6월 경학사耕學社와 1913년 공리회共理會 결성에 참여하여,「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旨書」를 작성하였다. 이처럼 김대락은 만주망명 후 줄곧 이주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12월 10일 길림성 삼원포 남산藍山에서 작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 참고자료

  『백하일기』(김대락)

  『고등경찰요사』

  「전통명가의 근대적 변용과 독립운동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