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김동삼
- 성명
- 김동삼
- 한자
- 金東三
- 생존기간
- 1878.6.23~1937.4.13
- 출생지
- 임하면 천전리
- 활동분야
- 만주방면
- 훈격
- 대통령장(62)
본문
본관은 의성義城. 초명은 긍식肯植·종식宗植.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송一松. 출신지는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 278번지(현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던 김동삼은 1907년에 들어 혁신적인 변화를 보이며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07년 3월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한 후 교감이 된 일이 바로 구국운동의 시작이다.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그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집안 어른인 김대락金大洛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김동삼은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이라 했다. 1914년에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385명을 인솔하여 독립군 군관구軍管區로서 통화현通化縣 팔리초八里哨 깊은 산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국내외 각처에서 전개될 때 길림(吉林)에서는「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는데, 김동삼은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 무렵 서간도에는 세 가지 조직이 결성되어 독립운동 전선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하나는 종래의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다른 하나는 백서농장 군영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또 다른 하나는 고산자에 있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각각 개편한 것이다. 먼저 한족회는 부민회의 유화·통화·흥경현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포에 모여 결성하였는데, 그때 백서농장에 대한 철수령을 내려 한족회를 민정民政과 군정軍政 이원체제로 결성하였다. 이때 김동삼은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포로 귀환하여 부민단을 확대·발전시킨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그리고 곧 백서농장 군영의 후신인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면서 서무사장 자리를 같은 마을 출신인 김성로金聲魯에게 인계했다. 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의 침략이 간헐적으로 자행될 때, 그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서 300여 명의 독립군을 이청천李靑天 사령관 인솔 하에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는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仁坊에 주둔시키고, 그는 8월에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방문하여 작전을 논의하였다. 그 후 서로군정서군이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치른 후 북상하여, 밀산密山에서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동삼은 서간도에 남아 독립전선을 재정비하였다.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을 맞아 삼원포 삼광학교三光學校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金東滿을 일본군에 잃고 가정을 북만주 영안현 주가둔周家屯(현 연안현 강남 조선족·만주족 공동 자치향)으로 옮기고, 자신은 유하현과 흥경현(현 신빈현) 일대로 옮겨 활동했다. 이후 그는 1922년 6월, 경신참변으로 붕괴되어 버린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여,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이후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全滿韓族統一會가 결성되었다. 이때 통군부는 통의부統義府로 확대·개편되었으며, 통군부 교육부장이던 김동삼이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리자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南滿洲의 한인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고,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당시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의 개조론改造論·창조론創造論으로 대립할 때 그는 개조론에 가세하였으나, 그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1923년 가을 만주로 돌아온 그는 독립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상룡·양기탁梁起鐸이 노력하던 독립군의 통합 업무를 인수하여 1924년 7월 10일과 10월 18일에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다. 거기에서 김동삼은 의장에 선임되어, 동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 데 주역을 맡았다. 또한 그는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이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김동삼은 1927년 4월 1일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상호부조 속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굳게 만드는 등 농민조합운동의 단서를 열었다.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유일당 촉성회의가 열리자, 김동삼은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가지고 분열된 독립운동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1928년 7월 삼부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앞서 김동삼은 정의부를 이탈하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이탈세력을 규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가 조직되었고, 김동삼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유일당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역에 국민부國民府가 출범됨으로써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조직되자 김동삼은 고문을 맡았다. 이와 같이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수습회의에 의장을 독점하다시피 선출되었던 일송 김동삼이었다. 그것을 통해 그의 틀이 큰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 또 그는 남만통일회·국민대표회의·전만통일회·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 등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에 정성을 쏟은 통일의 화신 역할을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김동삼은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묘는 서울현충원에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참고자료
「신원카드」
『백하일기』(김대락)
『기려수필』
『고등경찰요사』
『한국독립운동사』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임시정부의정원문서』
『독립운동사』2·3·4·5·7·8·10권
『독립운동사자료집』3·9·14집
《동아일보》1933.1.12
《조선일보》1923.1.29, 3.19, 4.18, 6.26, 10.2, 1925.4.14·17, 1932.12.24·26·29, 1933.1.14, 1937.4.15
《독립신문》1922.9.30
* 사진출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