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김시현
- 성명
- 김시현
- 한자
- 金始顯
- 생존기간
- 1883.6.9~1966.1.3
- 출생지
- 풍산읍 현애리
- 활동분야
- 의열투쟁
본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화潤和. 호는 하구何求·학우鶴友. 출신지는 풍북면豊北面 현애동玄崖洞 358번지(현 풍산읍 현애리). 김시현은 청소년기에 안동에서 일어난 갑오·을미의병을 겪으면서 항일의식을 가졌다. 1908년 이후 교남교육회의 일원으로 영남지방의 항일 구국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통해 항일의식을 더욱 다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그 해 5월 상해를 거쳐 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망명 애국지사들 가운데 김좌진金佐鎭을 비롯하여 황상규黃尙奎·장건상張建相·김원봉金元鳳 등과 접촉하면서 직접적인 항일 독립투쟁에 뛰어들었다. 그 이듬해 국내에 잠입하여 국내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위해 동지규합·군자금 모금·무기구입 등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20년 9월 대구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감 후 바로 상해로 망명한 그는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 참석하여 조선대표단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 상해로 돌아오면서부터 본격적인 무력적 의열투쟁에 앞장섰다. 김시현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과 함께 7월 하순경부터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대규모 폭탄운반(일명 ‘김시현·황옥’ 사건)의 실행 책임을 맡았다. 그는 김지섭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사전 계획을 세운 뒤 황옥을 포섭하여 류석현·장건상 등과 더불어 그 이듬해 3월 초순경부터 실행하였다. 그러나 3월 15일 이들 일행 13명은 모두 체포되어 실패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29년 1월 29일 대구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 이후 그는 다시 망명하여 만주 길림을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하던 중 김규식의 요청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는데 힘썼으며, 의열단의 길림과 북경의 대표자로서 활동하였다. 당시 중국 국민당 하북성 당부와 북평시 당부와 연계되어 활동하면서, 1934년 5월 초순경 북경에서 배반자 한삭평韓朔平을 처단하는 일을 지휘하다 체포되어 9월 22일 일본 장기지방재판소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39년 이른 봄 출옥한 김시현은 이듬해 북경으로 다시 건너가 국내와 자주 연락하며 전국을 무대로 군자금 조달·동지규합·무기구입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활동으로 인해 그는 1944년 4월 북경에서 또 다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 해방을 맞을 때까지 경성헌병대에 감금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 참고자료
『교남교육회잡지(회원명부)』
『독립운동사』3·7권
『약산과 의열단』
『독립운동사자료집』9·11집
『고등경찰요사』
《동아일보》1921.3.5, 1923.4.13, 8.9, 12.15, 12.19, 12.20, 1924.4.20, 1929.1.31, 9.16
《조선일보》1923.8.12, 8.29, 1934.9.22, 9.29
* 사진출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