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김원식
- 성명
- 김원식
- 한자
- 金元植
- 생존기간
- 1889.8.28~1940.1.10
- 출생지
- 서후면 금계리
- 활동분야
- 만주방면
- 훈격
- 독립장(68)
본문
본관은 의성義城. 이명은 김소창金笑蒼. 자는 계서繼緖. 출신지는 서후면西後面 금계동金溪洞(현 서후면 금계리). 김원식은 1919~1920년 사이 대구를 중심으로 폭탄구입과 임시정부 자금지원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과 동포 지원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만주지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그는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李相龍과 상의하여,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국내를 왕래하는가 하면,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파견원으로 북경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1924년 11월 24일 김동삼金東三·김응섭金應燮·이광민李光民 등과 정의부正義府 설립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1926년 11월 제3회 중앙회의에서 법무위원으로, 1928년에는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4년 11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결성에 주역으로 참여하여, 1926년 11월 26일 중앙집행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다.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도 선전부 간부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1일 김동삼·이광민 등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여 만주지역 동포들의 산업생산 증가와 교육 발전 및 위생·보건 향상에 노력하는 등 전반적으로 만주 이주한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그는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열린 유일당 촉성회의에 참여하여 김동삼·이광민·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분열되어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경 중국 본토에서는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이 펼쳐지고, 국내에서도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어 좌우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합작을 도모하게 되자 만주지역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김원식은 1927~1928년에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로 구성된 만주지역 3대 독립운동 추진체를 통합하는 3부 통합회의에 정의부 대표로 참석하여, 분열되어 있는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운동이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결렬되자, 김원식은 김동삼과 함께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를 구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30년 3월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全滿韓人反帝國主義大同盟創立籌備會 결성에 참여하여, 김동삼과 함께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을 하다가,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중국 본토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만주지역 독립운동계는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3부 통합운동은 결국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재만)이라는 두 단체로 정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이청천李靑天이 이끄는 한국독립당군의 지도부는 1934년 남경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주변에 포진하였고, 조선혁명당군도 간부 일부가 남경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김구의 초청으로 남경에 도착한 이청천은 한인청년들을 군사 간부로 양성하는 일에 매달렸다. 김구가 장개석으로부터 허락 받아 마련한 이 사업에 김원봉金元鳳도 참여하였다. 그래서 개설된 과정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일명 한인특별반)였다. 학교는 중국군관학교였지만, 한인청년에 대한 교육은 이청천을 비롯한 한인군사간부들이 책임지는 운영방식을 채택했다. 이청천은 한인특별반을 운영하기 위해 입교생을 모집하려고 북경에 신임이 두터운 대표를 상주시켰다. 그 대표가 바로 김원식이었다. 1931년에 체포되었다가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다시 망명한 그를 북경에 보낸 것이다. 북경에 파견된 김원식은 덕승문德勝門 안 회문공우會文公寓 9호를 거점으로 삼고 통의부統義府 활동 때 동지였던 김두천金斗川과 당시 동아일보 길림지국 기자 한일광韓一光 등을 동원하여 두 달여 만에 18명이나 모집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입교생 모집활동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그는 남경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김원식은 1932년 4월 13일 상해에 잠입하여 김원봉·김규식金奎植(우사) 등과 만주사변에 대항한 중한항일의용군을 결성했는데, 그때 다시 만주로 파견되어 이청천·김상덕金尙德과 함께 새롭게 독립군을 일으켜 한중연합전선을 펴다가 1933년 동녕현전투 이후 이청천과 함께 관내로 이동했다. 관내로 들어온 그는 신한독립당 결성에 주역으로 참여하였으며, 이어서 1935년에는 남경에서 양기탁·김규식·김원봉 등과 함께 좌우합작, 혹은 민족협동전선체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여 새로운 정세에 대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1월에 작고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 참고자료
『경사유방』
『고등경찰요사』
『기려수필』
『국외용의조선인명부』
『한국독립운동사』
『한국독립사』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독립운동사자료집』14집
『임시정부의정원문서』
『독립운동사』4·5권
《동아일보》1927.
* 사진출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