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김응섭
- 성명
- 김응섭
- 한자
- 金應燮
- 생존기간
- 1878.11.10~1957.5.29
- 출생지
- 풍산읍 오미리
- 활동분야
- 만주방면
본문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 출신지는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현 풍산읍 오미리). 김응섭은 1908년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가입하여 본회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여 법무사장法務司長으로 선임되어 이주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노력하였다. 또 김응섭은 1919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김동삼金東三과 참여하여 정부 수립을 위한 모임, 즉 제헌의회의 성격을 가진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정부 명칭과 헌장 결정 등 초기의 활동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 법무차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의용단義勇團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1년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하여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1923년 6월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세력들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8월 김응섭은 이광민李光民과 함께 반석현磐石縣에서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을 조직하기로 하고, 1924년 11월 창립총회를 열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6년 3월에는 중앙집행위원 및 상무집행 위원회 위원장 겸 서무부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4년 11월 김응섭은 정의부正義府 발족에 주역으로 참여하여, 중앙심판원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정의부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을 김동삼金東三, 1년 뒤에는 김형식金衡植이 민사(내무)위원장에 선임되었는데, 김형식은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또 금계동金溪洞 출신 김원식金元植은 행정원 비서장을, 법흥동法興洞 출신 이광민은 서무주임을 각각 맡아 동분서주하였다. 이들에 의해 결성된 정의부는 남쪽 압록강변의 관전현과 환인현에 군사 거점을 두고 국내에 유격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길림성 일대 동포사회에 대한 민사업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였다. 또한 화전에는 화성의숙樺城義塾, 삼원포에는 동명학교東明學校, 흥경현 왕청문에는 화흥학교化興學校를 설치하여 각처의 소학과정 동포학교와 연계하여 중등과정의 민족교육을 강화하였다. 1926년경 중국 관내에서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는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유일당 촉성회의가 결성되었다. 김응섭은 한족노동당 대표로 참석하여 김동삼·오동진·이광민·김원식 등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 전선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유일당 촉성회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여러 가지 문제를 노출시켰다.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둘러싸고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결국 김응섭은 1928년 7월 김동삼과 함께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만주지역에서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한족노동당이 1928년 재만농민동맹으로 개편될 때 김응섭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참고자료
『고등경찰요사』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오미마을 사람들의 민족운동』
『교남교육회잡지(회원명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