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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

김재봉

작성일 2014.12.17 조회 646 작성자 학예연구부
성명
김재봉
한자
金在鳳
생존기간
1891.5.19~1944.2.28
출생지
풍산읍 오미리
활동분야
국내항일
훈격
애국장(05)

본문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주서周瑞. 호는 근전槿田. 출신지는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현 풍산읍 오미리).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제1차 책임비서를 지낸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태두였으며,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조국 독립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를 다니다가, 1912년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염직과를 3년간 수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917년 풍산 오미동에 오릉강습소를 개설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9월경『만주일보滿洲日報』경성지사 기자가 되었지만, 1920년 말 신문사의 폐지와 동시에 퇴직하였고, 이 무렵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북교통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된 안상길安相吉과 서울에서 만나, 그로부터『독립신문』을 비롯한 많은 문서들을 받아 대구지역에 파급시키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았다. 1921년 9월에 출옥한 그는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 시기 김재봉은『마르크스 자본론』·『사회주의학』·『레닌주의』·『진화』등과 같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여 사상과 활동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후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였고, 대회 결렬 이후에는 치타에서 소집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 꼬르뷰로(조선공산당중앙총국)에 참가, 5월 꼬르뷰로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국내에 들어온 그는 신사상연구회 조직에 참여했다. 또한 그 해 8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꼬르뷰로 국내부를 설치하고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1924년 꼬르뷰로 국내부를 대표하여 ‘통일 조공’ 결성을 협의하기 위해 각파 공산주의자그룹의 대표자 회합인 ‘13인회’에 참석했다. 10월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며, 이 무렵 화요회를 이끌었다. 그리고『조선일보』기자로 재직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개최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1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그리고 그는 1944년 2월 28일(음력) 사망했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

 

• 참고자료

  「신원카드」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집』1권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 사진출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