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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

김형식

작성일 2014.12.17 조회 656 작성자 학예연구부
성명
김형식
한자
金衡植
생존기간
1877~1950
출생지
임하면 천전리
활동분야
만주방면

본문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월송月松. 출신지는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내앞마을). 김형식은 1907년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에 참여하여,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고모부 이상룡李相龍이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결성하자, 종형從兄 김만식金萬植과 함께 참여하여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김동삼金東三·이상룡 등과 함께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부친 김대락金大洛을 모시고 친척 수십 명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이도구二道溝에 정착한 그는 부친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여,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新興學校를 건립하고, 새 망명지를 찾아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를 답사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사했다가 다시 삼원포 남산藍山으로 돌아왔다. 그때(1913) 경학사를 폐지하고 각처에 향약 자치기구를 설치하였는데 삼원포에는 공리회共理會를 결성하고 김대락이「공리회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1914년 12월 10일 부친 김대락이 작고하였다. 경학사 폐지 후에 설립한 공리회를 비롯하여 각 지역의 자치기구를 부민단扶民團으로 통폐합한 것은 1916년이었다. 이때 김형식은 서무부장을 맡았다. 이후 광업사廣業社를 조직하고 벼농사를 개발하는 등 만주 이주동포들의 생활안정에 기여하였다. 1919년 4월 김형식은 부민단을 확대 발전시켜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는데 주역으로 참여하여 학무부장을 맡아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법무사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4일에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間西總辦府의 부총판을 위촉받아 경신참변 후의 사태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1923년 독립운동 전선의 재정비를 위하여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릴 때 그는 한족회 대표로 참석하여 그 해 여름까지 상해에 머무르며 독립운동세력들의 결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해 가을 만주로 돌아온 그는 영안寧安으로 이사한 양자 김정로金正魯의 집으로 가서 휴양을 취하였다. 1924년 전만통일회全滿統一會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신병으로 취임하지 못했고, 1925년에는 정의부正義府 민사(내무부장)위원장에 선임됐으나 역시 건강 때문에 사양하였다. 1927년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는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참여하고, 취원창聚源昶으로 이사하여 그곳 조선족 민족학교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44년 연안의 독립동맹(조선의용군)에서 파견한 이상조李相朝로부터 조선독립동맹 북만지부 책임자로 위촉되어 독립운동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북만지부 책임자 명의로 김두봉金枓奉의 초청을 받아 평양으로 갔고, 그 뒤 혁명자후원회革命者後援會 회장에 당선되었고,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어 민족통일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금강산에서 자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 참고자료

  『백하일기』(김대락)

  『고등경찰요사』

  『국외용의조선인명부』

  『한국독립운동사자료』18집

  《황성신문》1910.1.11, 7.29

  《독립신문》192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