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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

류림

작성일 2014.12.17 조회 627 작성자 학예연구부
성명
류림 / 류화영 / 고상진
한자
柳林 / 柳華永 / 高尙眞
생존기간
1894.5.23~1961.4.1
출생지
예안면 계곡리
활동분야
중국방면
훈격
독립장(62)

본문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화종花宗 이명은 류화영柳華永·고상진高尙眞. 호는 단주旦州·월파月坡. 출신지는 임북면臨北面 계곡동桂谷洞 542번지(현 예안면 계곡리). 류림은 1907년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1911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대구와 안동을 오가면서 계몽운동이나 비밀결사 조직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15년 정진탁鄭振鐸(澤)과 함께 대구에서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김용하金容河와 함께 자강회自彊會(自强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역시 안동의 임동면臨東面 편항시장鞭巷市場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국내활동이 어렵다는 판단하에 가족과 함께 봉천성奉天省 요중현遼中縣으로 망명하였다. 요중현에 도착한 그는 가족을 남겨둔 채 1919년 말에서 1920년 초 사이에 남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여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여름 무렵 류림은 유학차 다시 상해로 이동하고, 북경을 오르내리며 신채호申采浩와 김창숙金昌淑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나키스트로 변신하던 신채호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도 아나키즘에 눈을 떴다. 1922년 홀연히 중국대륙의 깊숙한 내륙에 자리잡은 성도成都로 유학가,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와 에스페란토어 등 다양한 외국어를 습득하였다. 1926년 초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신지식으로 무장하고서 중국 내륙여행을 거쳐 만주로 돌아와 향후 항일투쟁 방향을 가늠하였다. 잠시 신민부新民府를 찾아 김좌진과 공동노선을 모색해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에 참석했다가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는 실적을 올렸다. 1929년 11월 7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일본경찰은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아내지 못하자 그를 봉천으로 추방시켰다. 그 후 봉천에서 그는 사범대학 영문과 졸업생으로서, 아나키스트로서, 그리고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차원에서 1930년 말부터 의성숙義誠塾(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31년 10월경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5년형을 선고받아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0월 8일 출옥할 때까지 모두 6년 동안 옥중에서 고생하였다. 그는 곧 2차 망명길에 올랐다. 연안을 거쳐 중경으로 건너간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로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2년 10월 20일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1943년 2월 16일에는 외교위원회의 연구위원이 되었고, 이어서 그 해 4월 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 등 14명과 함께 임시정부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4월에 그는 국무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12월에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서 환국還國하였다. 이후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을 창당하여 그 대표가 되었다. 묘는 서울 강북 수유4동에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참고자료

  「신원카드」

  『독립운동사』4권

  「단주 류림의 독립운동」

  『단주 류림 자료집』1

  『독립운동사자료집』11집

  「판결문」(1933.7.6, 고등법원)

  《동아일보》1929.11.11‧11.17‧11.18‧11.27‧12.3‧12.11, 1931.7.31‧8.8‧10.7, 1932.12.23‧3.20, 1933.3.27

 

* 사진출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