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류인식
- 성명
- 류인식
- 한자
- 柳寅植
- 생존기간
- 1865.5.3~1928.4.29
- 출생지
- 예안면 주진리
- 활동분야
- 국내항일
- 훈격
- 독립장(82)
본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 출신지는 예안면 주진리(삼산). 류인식은 ‘파리장서의거’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류필영柳必永의 아들이다. 류인식은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전통적인 영남유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896년 의병에 참가한 뒤 1903년경 상경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류인식은 신채호申采浩·장지연張志淵 등과 교류하며 서구의 근대사상과 학문에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1903년에 신채호를 만나면서 사상과 행동에 커다란 변화의 전기를 맞이하였으며,『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등 새로운 책을 접하게 되면서 비로소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해 폭넓은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1904년 보수 유림의 전통이 강한 안동에 근대식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보수 유림들은 강하게 그를 비판하였으며, 그는 생부인 류필영으로부터 부자의 관계를 끊기는 아픔을 당했고, 스승 김도화로부터도 파문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비난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도 그는 안동에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유림을 설득시켜, 결국 1907년 봄에 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김동삼金東三과 함께 임하 내앞[川前]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이후 그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을 펼쳤으며, 1907년 11월 대한협회 조직에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이 중심이 되어 공화제 수립과 자주독립국가의 달성을 위해서 결성한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신민회는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해외이주를 추진하였다. 이에 류인식은 협동학교의 업무를 류동태에게 위임하고, 안동출신 인사인 이상룡李相龍·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에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데 참여한 그는 교육부장을 맡아 독립운동기지 건설 및 이주한인들의 생활안정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자연환경과 농사법의 차이로 흉작이 거듭되어 경학사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류인식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 고향인 삼산三山의 전답을 정리하던 중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석방되자 그는 1917년 고향 안동에서 협동학교 운영을 맡으면서, 이후 안동지방의 사회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귀국한 이후 1910년대에 그는『대동사』라는 역사서를 저술하였는데,『대동사』는 단군에서 시작하여 경술국치까지 4243년 간의 우리나라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서술된 총 21권 11책의 통사로 1917년 무렵 초고가 정리되었고, 이후 수년간 보완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저서는 교육이 철저히 억압당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귀중한 작업이었으며, 그 자체가 바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이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류인식은 “민지가 미개하고 시기가 너무 이르다. 그러나 망국 1기紀가 차기 전에 이 운동이 일어남이 어찌 장쾌하지 않으리오”라고 평가하였다. 당시 안동에서도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는 와병 중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3·1운동 발발 이후 류인식에게는 또 한 번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국권회복운동의 방법과 주체에 대해 유림과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종전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 상인·노동자들도 일본 제국주의 억압의 사슬을 끊고 일어나야 할 해방운동의 주체로 삼게 되었다. 즉 그의 관심이 유교 지식인·청년 중심에서 노동자·상인 등 일제에 의해 착취당하는 대중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류진태柳鎭泰 등과 함께 전국교육기관을 통일하여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만 5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설립에도 참가,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부장으로서 경상도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지방의 청년·지식인들을 고무시켰다. 1926년 말부터 국내외 독립운동계에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나고,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그는 8월에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29일 서거하였다. 이에 신간회 안동지회는 다른 청년운동단체와 더불어 안동사회장을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묘는 대전현충원에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 참고자료
『백하일기』(김대락)
『동산유고전집』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독립운동사자료집』 12·14집
『한국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 8권
『시대의 선각자 혁신유림 류인식』
* 사진출처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