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봉

HONORED PATRIOTS

경북의 독립유공자

김재봉

작성일 2015.01.05 조회 954 작성자 학예연구부
성명
김재봉
한자
金在鳳
생존기간
1891~1944
출생지
안동 풍산읍 오미리
활동분야
국내항일
훈격
애국장(05)

본문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자 주서周瑞. 호 근전槿田. 안동 풍산읍 오미리. 김재봉은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를 다니다가 1912년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염직과를 3년간 수학하고 귀향. 1917년 풍산 오미동에 오릉강습소를 개설하여 계몽운동을 전개. 1919년 9월 경 만주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0년 말 퇴직. 이 무렵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북교통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된 안상길安相吉과 서울에서 만나, 그로부터 《독립신문》을 비롯한 많은 문서들을 받아 대구지역에 파급시키려다가 붙잡혀 징역 6월형 받음. 1921년 9월 만주로 망명.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 같은 해 11월에는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였고, 대회 결렬 이후에는 치타에서 소집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에 참가, 5월 꼬르뷰로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국내에 들어와 신사상연구회 조직에 참여. 1923년 8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꼬르뷰로 국내부를 설치하고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1924년 꼬르뷰로 국내부를 대표하여 '통일 조공' 결성을 협의하기 위해 각파 공산주의자그룹의 대표자 회합인 '13인회'에 참석. 10월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엮여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으며, 화요회 주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 주도. 1925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개최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활동. 1925년 12월 일제에 붙잡혀 징역 6년형을 받고 옥고 치르다가 1931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1944년 음력 2월 28일 순국.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

 

• 참고자료

  「신원카드」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집 』 1권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