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이상룡
- 성명
- 이상룡
- 한자
- 李相龍
- 생존기간
- 1858.11.24~1932.5.12
- 출생지
- 법흥동
- 활동분야
- 만주방면
- 훈격
- 독립장(62)
본문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이명은 계원啓元‧계원啓源.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출신지는 안동면安東面 법흥동法興洞(현 법흥동). 이상룡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멸망으로 인식하고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군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략과 대책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그 해 겨울 매제 박경종朴慶鍾(영해)과 함께 1만 5천 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차성충車晟忠(隱豹)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자신을 포함한 유림계의 대응태도와 입장에서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09년 4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이상룡은 신민회와 더불어 서간도 이주계획을 세우고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로 망명한 후 이상룡은 오로지 이주한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11년에서 1918년까지는 서간도로 이주해 온 우리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지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후 1930년경까지는 항일독립운동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상룡은 서간도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포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류인식은 교육부장을,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을 담당하였다. 경학사는 1913년 공리회共理會를 거쳐 1916년에는 부민단扶民團으로 개편되었다. 이런 일련의 조직들은 서간도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 이주해 온 한인들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곤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상룡은 당시 중국인들이 버려두었던 저습지를 헐값에 빌려 개간하였다. 몇 차례 시도 끝에 1914년경부터 벼농사를 지어 큰 수확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서간도 각지에 논이 개발되고 비로소 한인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서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경제생활이 안정되면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실천운동도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겼다.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 고산자에 토지를 구입하여 학교를 신축하고 본교를 두었다. 이것이 뒷날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상룡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대동역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역사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족정신과 주인정신을 동포들에게 심어주고자 우리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래서 한국고대사를 만주를 중심으로 단군→부여→고구려→발해의 흐름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한→신라·백제·가야로 연결시키는 이원적인 구도를 체계화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만주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것은 만주와 중국 북부가 고대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는 점을 부각시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그를 통해 독립에 대한 신념을 동포들에게 주입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전후하여 국외에서도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이에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 이상룡은 김동삼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만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구였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을, 김동삼은 서무사장(김동삼이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으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성로金聲魯가 서무사장에 기용되었다)을, 김형식金衡植은 학무사장을, 김규식金圭植은 학무부장을 각각 맡아 활약하였다. 또한 이상룡은 1919년 4월 유하현 고산자에서 서간도 한족대표를 모아 독립전쟁을 주도해 나갈 군정부 즉 군사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으로서 군정서 조직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것이 바로 1919년 4월에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였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으로, 김동삼은 군사 지휘를 총괄하는 참모부의 대표인 참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외에도 김성로는 서무, 김응섭金應燮은 법무, 김형식은 학무를 담당하였다.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와의 항쟁을 계속하던 이상룡은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그것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그는 1921년에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상해에서 개최되자 김동삼을 비롯한 핵심운동가들을 파견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면직안이 통과되었다.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된 박은식은 헌법개정을 추진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국무령체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였다. 그 해 9월 9일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은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단체나 독립군 양성을 통해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다수의 운동가들은 이미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에 비협조적이었다. 6개월가량 독립운동세력의 조정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1926년 봄 국무령직을 사임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다시 돌아온 이상룡은 우선 만주 내 독립운동단체만의 통합이라도 먼저 이루려는 생각에서,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 3대 재만광복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일제의 만주와 중국대륙침략은 더욱 가열되었다. 1932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에서의 항일운동도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그만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으로 여러 달째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상룡은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순국하였다. 의병에서 시작된 석주의 독립운동은 끝까지 무력항쟁론·독립전쟁론을 고수해 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묘는 서울현충원에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참고자료
「백하일기」(김대락)
『석주유고』
『동구유고』
『세심헌일기』
《동아일보》1932.6.26
『기려수필』
『고등경찰요사』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독립운동사자료집』 1·3집
『한국민족운동사자료』(중국편)
『한국독립운동사』
『한국독립사』
『독립운동사』, 2·3·4·5·7·10·1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