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RED PATRIOTS
안동의 독립유공자권오설
- 성명
- 권오설 / 홍일헌 / 권일 / 박철희 / 김삼수 / 김형선
- 한자
- 權五卨 / 洪一憲 / 權一 / 朴喆熙 / 金三洙 / 金亨善
- 생존기간
- 1897.11.25~1930.4.17
- 출생지
- 풍천면 가곡리
- 활동분야
- 국내항일
- 훈격
- 독립장(05)
본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백倫伯. 호는 막난莫難. 이명은 홍일헌洪一憲·권일權一·박철희朴喆熙·김삼수金三洙·김형선金亨善. 출신지는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현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권오설은 34년의 일생을 사회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생을 마쳤다. 권오설은 1907년 가일에 있는 남명학교南明學校에 입학 후 동화학교東華學校:남명학교가 하회에 있는 동화학교로 편입됨)에 편입되었다. 1914년 동화학교 졸업 후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하였으나 2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와 경성부기학교京城簿記學校에 입학 후 퇴학하였다. 그는 1918년 전남도청에 부임하여 근무하던 중 1919년 광주 3·1만세시위에 참가하다가 체포되었다. 권오설은 1919년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11월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조직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우선 그의 고향마을인 가곡에 가곡농민조합佳谷農民組合을 조직하고, 1920년 8월 안동청년회安東靑年會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9월 4일 일직면금주회一直面禁酒會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9월 23일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朝鮮勞動共濟會 安東支會에 입회하였다. 1920년 4월 일직서숙一直書塾과 1922년 풍산학술강습회豊山學術講習會를 설립하여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2년 풍산청년회豊山靑年會와 풍산소작인조합豊山小作人會組合에 참여하였고, 1923년 11월 11일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지역사회의 활동에 그치지 않고 1924년 상경하여 김재봉金在鳳이 이끌던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2월 11일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4월 17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 풍산소작인회의 대표로 참가하였고, 4월 20일 50인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과 10인상무위원회의 상무위원이 되었다. 4월 하순에 조선노농총동맹 임시대회 사건으로 간부 2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5월 3일 무죄 방면되었다. 12월 25일 조선노농총동맹 상무위원의 자격으로 남부지방에 파견되어 가맹단체 내용조사와 가맹 권유 및 일반통계를 조사하였다. 또한 무산자동맹회 회원 및 혁청당 당원·불꽃사[火花社]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24년부터 인쇄직공조합을 조직하여 1925년 2월 9일 인쇄공파업(대동인쇄주식회사 문선공 동맹파업을 신흥청년동맹이 지도하도록 하였음)과 양말직공파업·고무직공파업·양화직공파업 등을 지도하였다. 1925년 1월 3일 재경사회운동자간친회在京社會運動者懇親會 발기에 참여하였고, 1월 8일 안동에서 화성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2월 16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 조직 및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월 18일에는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에 출석하였다. 4월 17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당에 참가하여 18일 조선공산당(제1차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피선, 같은 날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조직에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또한 김단야(金丹冶:고려공산청년회)와 함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생 21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동생 권오직權五稷도 보냈다. 그 해 6월 조선노농총동맹 서면대회를 개최하고, 개표위원과 50인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 5일 신의주사건이 발생하자 은신하였고, 조선공산당(제1차당)사건 후 고려공산청년회 7인중앙집행위원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2월 중순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2월 하순 제2차 조선공산당(제2차당:강달영 책임비서)의 7인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26년 초 상해지역에서 여운형呂運亨·조봉암趙奉岩·김단야金丹冶·김찬金燦 등을 만나고 밀입국하였다. 그 해 2월 28일 조선공산당(제2차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중앙집행위원이되었다. 5월 3일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간부회에서 6·10만세운동 추진총책임을 맡아 5월 15일 선전문을 작성하여 인쇄총책임자 박래원에게 전달하였다. 이 사건의 전모가 6월 4일 발각되어 결국 권오설은 6월 7일 검거되었다. 이 일로 1927년 9월 13일 공판이 열려, 1928년 2월 14일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묘는 풍천면 가곡리 공동묘지에 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
• 참고자료
「신원카드」
『고등경찰요사』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권오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