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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7. 9월의 독립운동가 손영각·이한구
2017-08-31 18:22:34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97

 

 

‘17. 9월의 독립운동가

일제 침략에 맞선 산남의진 의병장 손영각ㆍ이한구

 

□ 공훈 개요

o 성 명 : 이한구(李韓久)ㆍ손영각(孫永珏)

o 생몰연월일

 ∙ 이한구 : 1870. 9. 16 〜 1907. 9. 2

 ∙ 손영각 : 1855. 3. 23 〜 1907. 9. 2

o 묘소 위치

 ∙ 이한구 : 포항시 북구 죽장면 현내리(縣內里) 창촌(倉村)

 ∙ 손영각 :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安溪里) 초감(草甘)(죽장 佳士里에서 이장)

o 주요 공적

 ∙ 1906년 3월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 결성

  대장 : 정용기(鄭鏞基) 중군장 : 이한구 참모장 : 손영각

 ∙ 1906년 4월 정용기 대장 구속

  중군장 이한구가 의진 지휘

  참모장 손영각이 대장 구출 작전을 시도

  경북 청송ㆍ강구ㆍ청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

 ∙ 1906년 7월 재기 약속 의진 해산

 ∙ 1906년 9월 고종(高宗) 특명으로 정용기 대장 석방

 ∙ 1907년 4월 경북 영천 동대산(東大山)에서 산남의진 재기

  정용기 대장을 받들고 중군장과 참모장으로 의진을 다시 일으킴

  경북 영해ㆍ청하ㆍ청송ㆍ포항 등지에서 활동

 ∙ 1907년 8월 청송ㆍ신녕ㆍ안동ㆍ의성 등지로 이동하며 무기 및 군량 모집

  8월 20일 포항 점령,

  8월 24일경 영천 함락, 일본 상인 야마우치(山內銀三郞) 처단

  8월 29일 일본군 청송수비대가 죽장으로 이동하자 이를 섬멸할 계획

 ∙ 1907년 9월 1일 21시 30분 이세기가 입암의 일본군을 선제공격하다 패함

  9월 2일 오전 2시경까지 격전을 펼쳤으나 참패(입암전투)

  이한구ㆍ손영각은 대장 정용기를 비롯 여러 장령들과 장렬하게 전사

 ∙ 1907년 9월 정용기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대장에 올라 의진을 이끔

 

o 훈 격

 ∙ 이한구 :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 손영각 : 건국훈장 독립장(1980년)

 

□ 공훈 설명

 

1. 가계와 성장

◆ 이한구(李韓久, 1870〜1907)

이한구는 본관이 여강(驪江)이며, 자는 한유(漢有) 또는 경일(景日), 호는 지포(芝圃) 또는 신성재(新省齋)라 하였고, 초명은 경구(暻久)였다. 그는 시조 여주(驪州) 향원(鄕員) 진사 세정(世貞)의 후손이며, 조선중기 뛰어난 학자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12대 손이다. 1870년 9월 16일 경북 월성군(月城郡) 강동면(江東面) 양동(良洞), 지금의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양동마을길)에서 태어났다. 그 뒤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지평리(芝坪里), 지금의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지동리(芝洞里, 새마을로)로 옮겨와 살았다.

이한구는 성품이 온후하고 재주가 뛰어나 일찍부터 학문을 닦아 이치에 밝았고,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 이러한 성품으로 주변의 많은 인사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특히 산남의진 대장이 되는 정용기(鄭鏞基)와도 우의가 깊었다. 정용기의 외가가 이한구의 집안이어서 이한구와는 인척 관계였다. 정용기의 부친 정환직이 관직에 오르기 전에 전국을 유람하고 다닐 때, 정용기가 죽장면 창리(倉里), 곧 죽장면 지동리(芝洞里) 창마을로 옮겨와 살게 되면서 서로 가깝게 지냈다.

 

◆ 손영각(孫永珏, 1855〜1907)

손영각은 본관이 월성(月城), 자는 내숙(迺叔), 호는 낙산(樂山)이라 하였다. 그는 1855년 3월 23일 경북 월성군(月城郡) 강동면(江東面) 양동리(良洞里), 지금의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아버지 손종건(孫鍾健)과 어머니 여주이씨(麗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개항 후 그는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답곡(畓谷), 지금의 경주시 북구 죽장면 지동리(芝洞里) 논골로 옮겨와 살았다.

손영각은 시조 고려 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종일품)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의 후손이다. 9대조 손등(孫登)은 조선 태조 때 사헌부감찰(司憲府鑑察)을 지냈고, 7대조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는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계천군(雞川君)에 봉해졌다. 6대조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은 시호가 경절공(景節公)이었다. 손소(孫昭)ㆍ손중돈(孫仲暾)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학자로서 수수서원(凁水書院)ㆍ동강서원(東江書院)에서 제사를 드려왔다. 이처럼 집안은 대대로 문장과 덕망이 높은 인물을 배출하였던 영남의 명문가였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믿음직스러웠고 기운이 세었으며 용모가 비범하였다. 부모에 효성 또한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 역시 깊어 주변 사람들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독학으로 공부하면서도 충신열사 및 병법 관련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사소한 일보다는 항상 큰일에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그가 개항 후 나라가 혼란해지자 동지들을 찾아 방황하다가 경북 영일군 죽장면 답곡(畓谷) 즉 지동리(芝洞里) 논골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정용기, 이한구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2.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등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 책동으로 대세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통탄하던 고종(高宗)의 시종관(侍從官) 정환직(鄭煥直)이 1905년 12월 의병을 일으키라는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들고 장남 정용기를 불러 상의한 후 영남지역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부친의 명을 받은 정용기가 고향으로 내려와 오랜 친구이자 고향 동지들인 이한구와 손영각을 만나 거의의 뜻을 전했다.

이한구와 손영각은 이에 적극 찬동하고 경북 영천(永川)에서 창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1906년 1월 민중들을 권고하는 권고가(勸告歌)를 지어 애국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통유문(通諭文)과 격려문(激勵文) 등을 작성하여 각계 각층에 배포하여 창의에 대한 광범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어서 영천에 영천창의소(永川倡義所)를 꾸리고 의병 모집 책임자를 각지에 파견하여 의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 이한구는 경북 청송으로 들어가 직접 군사를 모집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경상도 일대에서 소규모 부대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의사들도 다투어 집결하였다. 창의소에서는 1906년 3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호(陣號)를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하여 의진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창의를 위해 핵심적 역할을 해 온 이한구는 중군장에, 손영각은 참모장에 취임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휘하 10여 개 부서의 진용이 꾸려졌다. 의진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의진은 창의 초부터 관동(關東)으로의 북상에 목표를 두었다. 서울과 영남에서 결성된 의병부대가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한다는 정환직의 원대한 거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3. 중군장 이한구가 의진을 이끌다

진용이 꾸려지자 신돌석(申乭石) 의진이 영덕군 영해에서 일본군 토벌대에게 패하여 도움을 청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한구ㆍ손영각은 대장과 의논한 뒤 이를 돕기 위해 본영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영해를 향해 진군하였다. 1906년 4월 28일 경주군 신광면 우각(牛角), 지금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 우각리를 지나다가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병사로부터 ‘대장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이 서울에서 구속되었으니 의논할 일이 있다’는 요지의 진위대장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서신을 전달받았다. 이에 이한구가 중군장으로써 일단 의진의 모든 뒷일을 맡기로 하고 대장 정용기는 단신 필마로 경주로 급히 떠났다. 이것이 경주진위대의 간계였고, 이에 속아 대장 정용기는 잡혀 경상감영에 구속되고 말았다.

경주진위대의 간계를 알아차린 이한구와 손영각은 일단 부서를 다시 정하고 신돌석(申乭石)의진의 도움을 받아 대장 구출 작전을 폈다. 손영각이 일대를 이끌고 대구방향으로 추격하였으나 대장은 이미 대구 감영으로 옮겨져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 이한구는 손영각과 함께 본진을 재편성하여 이끌고 청송 주왕산(周王山)으로 들어가 영덕ㆍ강구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6년 윤 4월 10일 밤 강구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이 무렵 좌영장(左領將) 이경구(李景久)가 흥해 약곡(藥谷)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약곡으로 나아가 그를 격려하였다.

이한구는 손영각과 함께 같은 해 5월 4일 경북 청하(淸河)를 습격하려고 의진을 이끌고 청하 덕성(德城)을 거쳐 진격하던 중 일본군 100명의 기습 공격을 받아다. 의진은 접전을 펼쳐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여기서는 참모장 손영각의 역할이 컸다. 그 뒤 영천ㆍ강구ㆍ청하 등 여러 곳을 옮기며 활동하였으나 상황이 너무 불리하였다. 대장 정용기의 구속으로 지휘부가 흔들리면서 진세는 위축되었고, 영덕의 신돌석의진 마저 일본군에게 패하자 의병들의 사기 또한 크게 저하되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군의 대부대 병력의 증파로 희생자 수는 늘어만 갔다. 하는 수없이 의진 지도부는 병사들에게 정용기 대장이 돌아오면 다시 일어난다는 약속을 하고 의진을 해산하였다. 때는 1906년 7월 하순경이었다.

 

4.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키다

이한구가 이끌던 의진이 구심점을 잃고 해산하자 정환직은 아들이 구속된 사실을 고종께 아뢰었고, 고종은 특명으로 정용기를 석방하게 하였다. 정용기는 정환직의 주선으로 그해 9월 대구경무청에서 풀려났다. 1907년 4월 이한구와 손영각은 모집한 군사들로 의진 진용을 확대 편성하고, 정용기 대장 아래 중군장과 참모장을 맡아 본진을 이끌었다. 반면, 정환직은 후방에서 중국인 왕심정(王心正)을 통해 무기를 조달 지원하였다. 이한구와 손영각은 청송(靑松)ㆍ영천(永川)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북상 길을 트기위해 노력하였다.

정용기의 휘하의 의진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것은 1907년 7월경부터이다. 이한구와 손영각이 중심이 된 의진은 북상할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안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면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일본군이 통로를 가로 막아 북상은 계속 지연되었다. 1907년 8월 초 청송ㆍ신녕ㆍ안동ㆍ의성 등지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적세를 탐지하였다. 8월 14일 미명 신령(新寧) 근처에서 추격해 온 적을 맞아 격퇴시켰다.

이한구와 손영각은 북상 길을 열기 위해 신돌석 의진과 계속 연락하며, 8월 20일경에는 포항을 점령하였다. 8월 24일 일본군과 영천 관군이 영천군 자양면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자, 부대를 2대로 나누어 출격하여 일본군과 관군을 포위하였다. 영천을 장악하고 일본상인 야마우치(山內銀三郞)을 처단하였으나 탄약의 부족으로 산속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이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檢丹洞), 지금의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忠孝里)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 급히 출격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으나 민가는 이미 불탄 뒤였다.

 

5. 입암전투에서 전사하다

이한구와 손영각은 1907년 8월 26일 대장과 함께 의병 150여 명을 이끌고 영일군(迎日郡) 기계면(杞溪面) 가천동(駕川洞), 지금의 포항시 북구 기계면 남계리(南溪里) 안국사(安國寺)에 주둔하였는데, 이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 청송수비대(11중대 宮原 소대)는 흥해분파소를 출발하여 8월 27일 오전 10시경 안국사에 도착하였다. 의진이 이동한 뒤였다. 청송수비대는 이곳이 의병 본거지였다고 하여 안국사를 소각한 뒤 의진을 계속 추격하였다. 안국사를 출발한 뒤 이한구와 손영각은 대장 정용기와 의논하여 1907년 9월 초순까지는 북상을 이루기로 하였다. 그 과정으로 본진 100여 명을 이끌고 8월 29일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梅峴)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이날 오후 4시경 추격하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척후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한구와 손영각은 보고를 받고 대장과 의논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이 죽장면 입암리에 유숙할 것을 예측하고, 본영의 연습장 우재룡(禹在龍), 우포장 김일언(金一彦), 후봉장 이세기(李世紀)에게 각기 일대씩을 이끌고 세 방향으로 내보내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본진이 9월 2일 새벽 일본군을 공격하여 섬멸하기로 계획하였다. 9월 1일 밤 이세기 부대가 죽장면 입암을 지나 책임지인 광천(廣川)으로 나가던 중 입암 원촌(院村) 마을 불빛 속에 일본군 병사 수명이 취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발견하자 성급하게 공격을 하였다. 처음에는 성공한 듯 하였으나 곧 주변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 수비대(守備隊)의 역습을 받고 패주하고 말았다.

본진에서 이한구와 손영각 등은 갑작스런 포성에 놀라 대장과 함께 본대를 이끌고 입암으로 긴급 출동하였다. 9월 2일(양력 10월 8일) 새벽 0시경 전투지에 도착하였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갑자기 일본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약 2시간 동안 벌어진 이 격전에서 이한구와 손영각은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 여러 장령들과 함께 전사하는 참화를 입었다. 손영각의 동생 영준(永濬)도 그 다음날 전사하였다. 이 전투를 ‘입암(立岩)전투’라고 부른다. 일본군 청송수비대는 이 전공으로 제14 연대장(國池主殿 대좌)의 상을 받기도 하였다.

패전의 가장 큰 원인은 첫째, 어둠속에서 의병들이 입은 흰 옷은 유난히 적에게 잘 들어나 쉽게 노출되었기 때문이고, 둘째, 앞서 패하고 흩어졌던 이세기 부대와의 연락 두절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셋째, 일본군이 깊은 산골에서 오직 한 길 뿐인 좁은 길 좌우 석벽(石壁)의 지형을 선점하여 이용했던 지형적 조건 등이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아들을 대신한 정환직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각지에서 항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같은 해 12월 정환직마저 잡혀 피살 순국하였다. 이후 남은 병사들은 1908년 3월 보현산에서 최세윤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분진 체제로 전환하여 1910년경까지 항전을 이어나갔다.

 

6. 평가와 의의

이한구와 손영각은 정환직이 고종의 밀조를 받들고 아들 정용기를 고향에 내려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했을 때, 가장 앞장서서 창의를 추진하여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과 참모장이란 중책을 맡아 의진을 이끌었다. 이들은 관동으로의 목표 속에서 신돌석 의진과 연락하며 우여곡절 속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도 여러 차례 전투를 펼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입암전투에서 이한구ㆍ손영각ㆍ정용기 등이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한말 의병사에서 큰 자취를 남겼다.

이들 셋은 동향인으로써 오랜 친구 사이였고, 혈연으로는 먼 친인척 사이였다. 이들은 나라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을 때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이란 이름에 투신하여 목숨을 불태웠다는 이 사실은 후세인들에게도 깊은 감명과 훌륭한 교훈으로 길이 남아 전해질 것이다.

 

*담당부서 및 담당자: 학예연구부 차장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0-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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