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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7. 8월의 독립운동가 이봉희
2017-08-16 11:50:09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00

 

 

‘17. 8월의 독립운동가

만주에서 조국광복 위해 살다간 이봉희

 

□ 공훈개요

o 성 명 : 이봉희(李鳳羲)

o 생몰연월일 : 1868~1937

o 주요 공적

∙1868년 안동 임청각 출생(석주 이상룡 동생)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 참여

∙1911년 이상룡 등 가족과 함께 만주망명

∙1911~19년 경학사․신흥강습소․한족회․서로군정서 참여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간도 외교원 임명

∙1937년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남

 

ㅇ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90년)

 

□ 공훈설명

 

1. 안동지역 고성이씨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이봉희는 안동 고성이씨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고성 이씨 가문이 안동에 터 잡은 것은 15세기 후반이었다.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의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 입향을 처음 결정한 것이다. 이후 이증의 둘째 아들 이굉(李浤, 1441~1516)과 셋째 아들 이명(李洺)이 안동에 완전히 정착했다. 이 가운데 이명이 1519년 지금의 법흥동에 임청각(臨淸閣)을 지었다. 이봉희는 바로 임청각 출신이다.

이봉희는 1868년 이승목(李承穆, 1837~1873)과 안동권씨(1832~1902)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자는 덕초(德初)이고, 호는 척서(尺西)이다. 족보에 등재된 본명은 이봉희(李鳳羲)이다. 그러나 훗날 이계동(李啓東)으로 개명했다. 이름을 바꾸게 된 데에는 두 친형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큰형 이상희(李象羲, 1858~1932)와 작은형 이용희(李龍羲, 1865~1951)가 각각 ‘이상룡(李相龍)’과 ‘이상동(李相東)’으로 개명한 것이다.

이봉희 3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큰형 이상룡이 큰 업적을 남겼다. 이상룡은 1910년대 만주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끈 최고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까지 역임했다. 작은형 이상동은 국내에서 만주로 망명한 큰형 이상룡을 후원하는 한편, 1919년 3월 13일 ‘안동면’에서 일어난 첫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봉희는 줄곧 큰형 이상룡과 함께했다. 큰형 이상룡은 이봉희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6살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봉희가 큰형 이상룡을 특별히 더 따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봉희 3형제는 임청각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제1세대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제2세대 인물들도 거의 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였다. 1910년 나라가 멸망했을 때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 바로 이봉희가 있었다.

 

2. 만주지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다

이봉희는 만주로 망명하기 직전에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9년 5월 5일(음 3월 16일) 안동에서 설립된 계몽운동 단체였다. 그날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안동읍’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총회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56명이었다. 이때 임원이 선출됐다. 회장에는 이봉희의 큰형 ‘이상희(이상룡)’가 당선됐고, 이봉희는 9명의 평의원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이봉희가 큰형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이봉희가 만주 망명 이전부터 큰형 이상룡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봉희가 이미 ‘보수유림’에서 벗어나 ‘혁신유림’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이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하면서 해체됐다. 이에 이봉희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봉희가 선택한 길은 만주 망명이었다. 이것은 이봉희 혼자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큰형 이상룡을 비롯한 집안 가족들과 논의한 결과였다. 특히 임청각의 종손이었던 큰형 이상룡의 생각과 결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상룡은 나라가 멸망한 직후에 ‘만한지도(滿漢地圖)’를 펴들고 만주 망명을 고심했다. 이때 서울에서는 신민회의 양기탁과 이동녕 등이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1910년 12월(음 11월) 말, 신민회 간부로 있던 주진수(울진)가 황만영(평해)과 함께 안동으로 왔다. 두 사람은 이상룡에게 양기탁 등의 계획을 상세히 전달했다. 이상룡은 그 계획을 듣자마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이로써 이봉희도 큰형 이상룡과 뜻을 같이하게 된 것이다.

이봉희는 큰형 이상룡과 함께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석주(이상룡-필자) 집안만을 헤아려도 서른 가구가 넘게 망명”한 것으로 추산했다. 1가구당 가족구성원의 수를 최소 2명으로 잡더라도 약 60명에 이른다. 이것은 당시 만주로 함께 이주했던 평해지역의 평해황씨 해월공파 문중(황만영 집안/약 50여 명)과 서울지역의 경주이씨 백사공파 문중(이회영 집안/약 60여 명)에서 이주한 사람의 숫자와 비슷한 수치였다. 그 가운데 이봉희 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이봉희 본인과 아내 인동장씨(1865~?), 그리고 두 아들 이광민(李光民, 1895~1945)‧이광국(李光國, 1903~1978)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안동에서 만주로 떠난 시기는 1911년 2월(음 1월) 한겨울이었다. 이때 이봉희의 나이 44세였다.

이봉희는 집안 가족 인솔과 이삿짐 수습 일을 도맡았다. 그래서 큰형 이상룡과는 행보를 조금 달리했다. 큰형 이상룡은 1911년 2월 3일(음 1월 5일) 가산을 처분하고 가장 먼저 안동을 떠났다. 한편 이봉희는 그보다 늦은 2월 18일(음 1월 20일)경에 큰조카 이준형(李濬衡, 1875~1942)과 함께 나머지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만주로 출발했다. 이봉희 일행은 2월 23일(음 1월 25일) 신의주에서 이상룡과 만났다. 큰형 이상룡을 비롯한 가족들은 모두 2월 25일(음 1월 27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이봉희는 그날 다시 안동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짐을 수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봉희가 다시 안동을 떠나 만주로 완전히 이주하게 된 것은 한 달이 더 지난 뒤였다. 4월 5일(음 3월 7일) 안동에서 다시 출발해 4월 13일(음 3월 15일) 신의주에 도착했고,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 4월 16일(음 3월 18일) 현재 펑톈성(奉天省) 안둥현(安東縣)에 도착해 있었다. 이봉희는 5월 8일(음 4월 10일)경 첫 기착지였던 펑톈성 화이런현(懷仁縣) 헝다오촨(橫道川)에 도착했다. 마침내 그곳에서 큰형 이상룡을 비롯한 가족들과 합류했다.

이후 이봉희와 집안 가족들은 펑톈성 류허현(柳河縣)과 퉁화현(通化縣)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류허현과 퉁화현은 안동문화권의 여러 문중 인물들이 신민회 인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최종 목적지이자,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이 실현될 최초의 땅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서간도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일명 신흥무관학교)가 1911년에 문을 열었다. 경학사는 한인사회를 이끌어갈 자치기관이었으며, 신흥강습소는 독립군을 길러낼 교육기관이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서간도 독립운동기지’가 개척되는 과정에서 세워진 첫 결실이었다. 이것은 만주로 망명한 신민회와 안동문화권 등 여러 지역 인사들이 힘을 합쳐 설립한 것이었다. 여기에 이봉희도 적극 참여했다.

이봉희는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기반을 닦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한인들이 ‘만주’ 또는 ‘서간도’로 부른 지역은 사실상 중국의 영토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망명하거나 이주한 한인들은 중국의 지방 정부와 그 지역 주민들의 간섭과 배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집을 구하거나 토지를 매매할 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 당국과 직접 교섭해야 했다. 이때 교섭 대표로 바로 ‘이계동(이봉희)’과 이회영이 선출됐다. 각각 안동문화권과 신민회의 이주자를 대표해 선출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1911년부터 1912년 사이에 중국 펑톈성 정부를 여러 차례 방문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서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집과 토지를 구매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서간도 독립운동기지’의 기초 조직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서간도지역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다

이봉희는 만주 내에서도 주로 서간도에서 활동했다. 이봉희가 서간도에서 펼친 독립운동 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10년대 초반 서간도 한인사회가 굳건히 세워질 수 있도록 이주자의 정착과 생활 안정에 노력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봉희가 이회영과 함께 중국 당국과 교섭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봉희는 이주자들이 서간도로 몰려드는 길목에 객잔(客棧)을 설치하고 그들을 맞이하는 일을 담당했다. 일제 측 조사 기록에 따르면, 1911년 한 해에만 경상도지역(주로 경북지역)에서 서간도로 이주한 사람의 수가 2,5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주자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둘째, 1910년대에 서간도에서 설립된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봉희는 가장 먼저 경학사 설립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봉희가 경학사 설립에 참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아직 없다. 그렇지만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참여했다고 봐야 한다. 우선 큰형 이상룡이 경학사 사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봉희가 경학사 내무부장이었던 이회영과 함께 일을 추진해 나간 점도 그런 사실을 잘 증명해 준다. 이어서 이봉희는 1914년 9월경 류허현 ‘대단평’에서 문을 연 ‘신흥강습소’의 교장에 취임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은 1911년 6월 10일(음 5월 14일) 류허현 쩌우쟈가(鄒家街)에서 처음 설립됐던 ‘신흥강습소’의 여러 분교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큰형 이상룡이 1910년대 초중반에 주도적으로 조직한 광업사(廣業社)‧길남사(吉南社)‧자신계(自新契) 등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1910년대 후반에는 큰형 이상룡과 함께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한족회‧서로군정서 등의 단체에서 주요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 가운데 특히 서로군정서에 투신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큰형 이상룡도 당시 이봉희가 “유악(帷幄; 참모-필자)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셋째, 1920년 12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간도[間西]’ 외교원에 임명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서간도 시찰원이었던 조상섭(趙尙燮)이 ‘이계동(이봉희)’과 곽문(郭文) 두 사람을 서간도 외교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 10월에 발생한 ‘간도참변(경신참변)’ 문제를 수습하고자 단행한 인사 조치였음이 틀림없다. 당시 서간도에서는 약 1,323명의 한인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간도 외교원을 특별히 임명함으로써 외교적 차원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1920년대 초중반부터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1910년대부터 독립운동기지로서 기능해 오던 서간도는 1920년 일제가 저지른 ‘간도참변’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됐다.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근거지 마련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안동문화권에서 만주로 망명했던 인물들은 새로운 근거지로 북만주지역을 주목했다. 그 일을 맡았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이봉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봉희는 1926년 4월 현재 ‘하얼빈[哈埠]’에서 봄을 지냈고, 1927년에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탕위안현(湯源縣) 우퉁허시(梧桐河西)’로 이주해 농토를 개척했다. 이것은 모두 이봉희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선발대로 이주한 것이었다. 당시 지린성(吉林省)에 있던 큰형 이상룡도 이봉희가 이주한 곳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주할 비용조차 없을 정도로 곤궁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때 이봉희의 나이 60세였고, 큰형 이상룡은 70세였다. 이미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4. 이역만리 만주 하얼빈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이봉희는 1932년 6월 15일(음 5월 12일) 큰형 이상룡을 먼저 잃었다. 큰형 이상룡은 지린성 수란현(舒蘭縣) 사오궈뎬즈(燒鍋甸子)에서 75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이때 이봉희는 하얼빈의 ‘아성(阿城)’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한걸음에 달려왔고, 국내에서는 작은형 이상동도 먼 길을 건너왔다. 이봉희 3형제가 마지막으로 함께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큰형 이상룡은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서 기다리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큰형 이상룡의 유해는 사오궈뎬즈 마을 뒷산에 임시로 묻혔다. 큰형 이상룡의 손부 허은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이봉희가 “산 사람은 살아서 (큰형 이상룡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한다.

이봉희는 그 뜻을 그대로 따랐다. 큰형 이상룡의 장례식을 치르고, 큰조카 이준형 가족의 환국 준비를 주선했다. 이후 수란현에서 ‘장춘’까지 동행했다. ‘장춘’에서 큰조카 일행을 고국으로 떠나보내고, 이봉희는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이봉희가 큰조카 일행과 함께 환국하지 않은 이유는 큰형 이상룡의 유지를 받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봉희는 1911년 압록강을 건널 때 “원수들(일제-필자)과는 한 하늘을 지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 했었다. 이봉희는 큰형 이상룡의 유지와 자신의 맹세를 끝까지 지켰다. 1937년 3월 10일(음 1월 28일) 만주 하얼빈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것이다. 국내에서 이 소식을 들은 조카 이운형(李運衡, 1892~1972)은 이봉희의 삶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고인을 위로했다.

 

“만주 가신 지 27년여 이역 땅 풍상에서 구국운동과 기근과 일본 경찰의 등살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시다가 금년 70세에 서거하시니, 사방을 돌아봐도 친족이 없는 외로운 땅에 무슨 변이리요.”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담당부서 및 담당자: 학예연구부 차장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0-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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