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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7. 7월의 독립운동가 장석영
2017-08-02 09:11:52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24

 

 

 ‘17. 7월의 독립운동가

 파리장서운동을 펼친 전통유림 장석영

 

 □ 공훈개요

 o 성 명 : 장석영(張錫英)

 o 생몰연월일 : 1851~1926

 o 주요 공적

  ∙1851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출생, 한주 이진상의 학문 계승

  ∙1905년 을사5적 처단과 을사늑약 파기 상소투쟁 참여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했다고 전해짐

  ∙1912년 3월~6월 130일 동안 만주 조사

  ∙1919년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 작성과 서명

               4월 9일 붙잡혀 5월 20일 징역 2년형을 받음

              8월 21일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1926년 세상을 떠남

 ㅇ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80년)

 

□ 공훈설명

장석영(張錫英, 1851~1926)은 칠곡군 기산면(岐山面) 각산리(角山里)에서 참판을 지낸 장시표(張時杓)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석영을 비롯한 한주학맥의 인식과 활동이 어떤 점에서 같고 또 무엇이 다른지 시기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894년과 1895~96년까지 이어진 전기의병 시기에 한주학맥과 장석영이 보여준 대응이다. 1890년대 위정척사론을 바탕으로 전국에서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켰지만, 성주 유림들은 여기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장석영도 크게 보면 위정척사론과 화이론을 내세우면서도 직접 의병을 일으켜 오랑캐를 무찌르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 곽종석으로 대표되는 이 지역 유림의 성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거병하기보다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을 강조하고 서양의 여러 나라에 대한 외교에 무게를 두었다. 이들이 생각한 공법은 오로지 인의(仁義)에 근본을 두는 것이었다. 1896년 이승희·곽종석 등 한주학맥 인사들은 각국 공사관에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이라는 글을 보내 일제 침략이 만국공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규탄했는데, 이러한 활동도 외교방략에 무게를 둔 특징을 보여 준다. 장석영도 한주학맥의 그러한 인식과 노선을 걸은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긴 시기의 대응이다.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을사늑약)로 외교권을 잃게 되자, 전국 유림들은 앞 다투어 을사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전국 대부분의 유림들이 참가한 것인데, 전통적인 방법으로 황제에게 친일주구를 목 베라고 요구한 것이다. 장석영을 비롯하여, 이두훈·이승희 등도 이러한 상소투쟁에 참가하여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敵臣罷勒約疏)’를 올렸다. 그 요지는 을사5적을 목 베고 강제로 맺은 조약을 파기하라는 것이다.

셋째, 국채보상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이란 국가의 채무를 갚아서 식민지로 몰락하는 것을 막자고 나선 것이고, 담배를 끊어 돈을 마련하여 그 빚을 갚자고 나선 일이다. 이때 장석영도 칠곡의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칠곡군보상회장에 추대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장석영은 나라가 망한 직후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는 일을 가늠하였다. 1912년 봄부터 넉 달 동안 만주를 찾아 현장을 발로 누비면서 조사하고 돌아와 남긴 요좌기행(遼左紀行)은 그러한 뜻과 발자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장지영(張之榮)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이 기행문은 1912년 3월 7일(음 1.19) 칠곡 석진(石津) 자택을 떠나 6월 14일(음 4.29) 귀향할 때까지 130일 동안의 행적을 담았다.

그는 3월 18일(음1.30) 서울을 떠나 개성·평양·백마역을 거쳐, 3월 21일(음2.3) 신의주에서 압록강 다리 건너 안동현 도착하였다. 3월 24일(음2.6) 봉천(심양) 도착하고, 30여 명 친척들이 유하현(柳河縣)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 유하현은 바로 신민회와 안동문화권 인사들이 건설하고 있던 독립운동의 핵심 기지였다. 3월 29일(음2.11) 장춘에서 북간도 이야기를 듣고, 4월 1일(음2.14) 하얼빈을 거쳐, 3일(음2.16) 교계(交界)에 이르렀으며, 4일(음2.17) 보래포(寶來浦)에서 이승희 소식을 비로소 듣게 되었다. 

장석영은 비로소 이승희의 망명 5년 생활을 상세하게 듣게 되었다. 장석영은 목화포(木花浦)·사리포(四里浦)를 거쳐 홍토애(紅土涯)에 도착하고, 청국과 러시아 경계를 이루는 흥개호(興凱湖)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바로 이승희의 아들 이기인(李基仁)을 만났고, 5월 17일(음4.1) 신치(新峙)에서 이승희를 만났다. 장석영이 만주를 찾은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승희를 만나는 것이었다. 5년의 행적과 활동을 들으며, 장석영 스스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 터를 잡을 곳은 서간도라는 의견을 이승희에게 내놓았다. 그리고서 6월 3일(음4.18) 이승희와 이별하고, 목릉(穆陵)·하얼빈·장춘·봉천으로 이동하고, 6월 12일(음4.27) 밤 서울을 거쳐 김천으로 향하고, 이틀 뒤 6월 14일(음 4.29) 귀향하여 일정을 끝맺었다.

장석영은 곳곳에서 조국광복의 대계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던 동포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그러면서도 동포들이 만주에서 떠돌며 어쩔 수없이 민족의식과 풍속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 특히 유교의 생활규범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망명민의 통한을 깊이 체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조국의 멸망 못지않게 유교사상과 그 질서의 파괴를 막으려는 척사위정론에 입각한 배일사상을 더욱 다짐하는 측면도 뚜렷이 보였다. 그가 압록강 너머 서간도 지역이 알맞은 망명지라고 정리하지만, 정작 본인은 망명을 포기하였다.

 

1919년 3.1독립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여 독립을 이루자는 뜻으로 일어났다. 이때 ‘파리장서’는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만들고 유림들의 서명을 받아 중국을 거쳐 파리로 보낸 전체 내용을 묶어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이것도 3·1운동의 범주에 속한다. 이를 처음으로 추진한 인물은 광무황제 장례에 참석하러 서울에 몰려든 몇몇 젊은 유림이었고, 이들의 활동이 경북과 충남지역으로 폭이 넓혀지면서 문장 작성과 서명자 확보, 상해 이동과 번역, 그리고 파리로 보내는 단계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장석영은 장서, 곧 청원서를 초안하는 일과 서명에 참여하였다.

김창숙이 고향으로 와서 곽종석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자는 뜻을 말했다. 이에 곽종석은 장석영에게 독립청원서 초안 작성을 맡겼고, 또 제자 김황(金榥)은 곽종석의 거처에 머물면서 초안을 작성하였다. 곽종석은 이 가운데 김황이 쓴 초안을 중심으로 교열하였다고 알려진다.

김창숙은 교열본을 갖고 서울로 가서 마침 도착한 김복한의 청원서와 견주어본 뒤, 곽종석으로부터 받은 글을 기본으로 삼고 다시 작은 손질을 거쳤다. 마침내 김창숙은 이를 상해로 가져가서 또 다시 국제적인 상황을 헤아려 약간의 손질을 거쳤다. 그리고서 번역을 거쳐 파리강화회의에 우편으로 보내고, 아울러 또 각국 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우송하였으며, 해외 각 항구와 도시 등 동포가 사는 곳에도 배포하였다. 일본 경찰기록은 당시 파리장서의 인쇄부수는 한문본 3,000부와 영문본 2,000부였고, 이것이 프랑스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과 각국 공사관으로 발송되었으며, 국내의 모든 향교에도 한문본이 우송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6월 하순에 이 사실이 일경에 알려지면서 서명자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게 된 것이다.

한편 장석영은 자신이 지은 초안이 곽종석의 검토와 수정을 거쳐 김창숙에게 전해진 것을 알았을 것이다. 김창숙이 서울로 떠나간 뒤의 정황을 그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겠지만, 3월 그믐날, 그러니까 김창숙이 상해에 도착한 직후 무렵에 장석영은 다시 장서를 약간 손질하여 정종호(鄭宗鎬)를 거쳐 윤상태(尹相泰)에게 보냈다고 알려진다. 또한 그는 그 무렵 국내 동포들에게 보내는 글인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과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저총독부서(抵總督府書)」를 작성하였다. 이것이 실제로 발송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도 파리장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일경에 붙잡혀 들어간 이유가 되었다.

 

일제 경찰은 독립청원서를 보낸 낌새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얽힌 인사들을 조사하고 붙잡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진행과정이 모두 드러나지는 않은 상태였다. 독립청원서가 상해에 도착하고 파리로 발송된 사실이나, 137명 서명자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어서, 일제 경찰은 추진 사실을 추적하고 관련 중심인물을 검거하는 선에서 검속 작업에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장석영도 경찰에 불려가게 되었다.

장석영이 경찰에 불려간 그 날은 바로 성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던 때였다. 따라서 더러는 성주의 3.1운동과 파리장서를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은 다른 것이다. 장석영은 성주읍내에서 일어나고 있던 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하였고, 만세시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면서도 민중의 피해가 클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가서 옥고를 치르다가 풀려나온 과정은 그가 옥고를 치른 뒤 기록한 「흑산록(黑山錄)」(己未黑山日錄)에서 자세하게 드러난다. 그날그날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 풀려난 뒤 지난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삼아 그가 일경에 붙잡힌 것으로부터 일정의 흐름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석영이 성주경찰서에 불려간 날은 4월 2일이다. 처음에 경찰이 출두하라고 요구한 이유는 파리장서에만 초점을 둔 것은 아닌 듯하다. 이 보다 한 주일이 지난 4월 9일 정식으로 붙잡혀가게 되던 날 일경이 집안을 수색하고서 문서를 뒤졌으며, 장석영은 경찰 심문에서 자신이 「파리장서」·「通告國內文」·「抵總督府書」 등을 썼지만 외울 수는 없다고 진술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사실은 경찰이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더라도 독립청원서에 얽힌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것만이 구금 사유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만약 파리장서 작성과 송부 사실이 경찰에 발각되었다면, 그러한 심문 내용이나 정황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일지 내용이나 다른 정황으로 보아서도 그런 것을 찾을 수는 없다. 이는 일제가 지도급 인사들을 사전에 단속하거나 앞장서지 못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두었던 것 같다.

장석영은 붙잡혀 들어간 지 일주일 지난 4월 16일 대구감옥으로 옮겨지고, 1심 재판이 진행되어 5월 20일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다. 장석영은 곽종석·김창숙(궐석재판)과 더불어 징역 2년, 송준필·이봉희·송규선은 징역 1년 6월, 성대식·이기정·송우선·송회근은 각 징역 1년, 송수근·송훈익·김희규·송문근·송인집·송천흠은 징역 10월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에 장석영·송준필 등은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8월 21일 그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방면으로 결정이 나서 풀려났다. 이기정 등 12명에 대한 2심 재판에서 이봉희와 송규선 2명을 제외하고는, 장석영을 비롯한 성대식·이기정·송준필 등이 모두 풀려난 것이다. 파리장서 관련자에 대한 1·2심 재판 결과는 18명이 유죄를 선고 받았으나, 서명자 가운데 실형을 받은 인물은 곽종석(징역 2년), 김복한(징역 1년), 이봉희(징역 10월), 우하교(징역 6월) 등 4명뿐이었다. 나머지 인사들은 ‘정상참작’으로 집행 유예를 받거나, 장석영과 같이 ‘증거불충분’이란 이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장석영은 1851년 출생하여 1926년에 사망하였으므로, 그의 생애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전반부에 집중된 셈이다. 다만 파리장서가 3.1운동의 한 부분이라 평가되므로, 독립운동으로 보는 그의 생애는 3.1운동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장석영은 독립운동의 첫 단계인 의병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는 성주 한주학맥의 일반적인 현상과 마찬가지다. 외교권을 빼앗기던 1905년에는 집단으로 을사5적을 목 베고 억지로 맺은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데 참가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본격화되자 한주학맥은 여기에 참가하였는데, 그도 칠곡보상회장을 맡았다고 알려지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12년 장석영은 남만주를 거쳐 하얼빈에서 다시 동쪽 밀산을 향해 갔다. 망국 직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가 접경 지역인 밀산에 터를 잡았다고 알려진 동문 이승희를 찾아 의견을 듣는 것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에 알맞은 터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승희를 만나 의견을 나누고 돌아왔지만, 그는 끝내 망명하지는 않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김창숙을 기점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유림들의 파리장서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초안을 짓는 일을 맡았다. 김창숙이 떠난 뒤에 윤상태에게 장서를 보내 서양으로 보내는 일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장석영은 근대전환기와 국권상실기에 전통유림이 걸어간 한 유형을 보여준다. 혁신유림들이 계몽운동으로 나아간 데 반하여, 그는 전통유림의 틀에서 인식과 활동을 보여주었다. 혁신유림이 화두를 도통(道統)에서 민족으로 바꾸는 추세였지만, 그는 한주학맥이 대체로 그랬듯이 여전히 도통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는 근대변혁과 국권상실기에 성리학적 전통에 무게를 두면서도 점차 서양 열강의 존재와 힘에 기대를 거는 쪽으로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정부에서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담당부서 및 담당자: 학예연구부 차장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0-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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