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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5. 12월의 독립운동가 이현규
2015-11-27 09:17:43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1430

 

 

‘15. 12월의 독립운동가

나라를 구하는데 온 생을 바친 의병장 이현규李鉉圭

 

 

□ 공훈개요

○ 성 명 : 내산(奈山) 이현규(李鉉圭)

○ 생몰연월일 : 1874. 11. 16 〜 1917. 2. 3.

○ 주요 공적

∙1905년 11월 청송군 주왕산 대전사에서 창의

∙1906년 2월 영양 입암(立岩)에서 의진 편성

∙1906년 4월 진보(眞寶) 오누지 전투에서 일본군 다수 사살

∙1906년 5월 울진군 죽변(竹邊)의 왜관(倭館) 격파

∙1908년 봄 부대를 해산한 뒤,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牟津里)에 은거

∙1917년 2월 3일 총상 여독으로 44세를 일기로 순국

○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1968년)

 

 

□ 공훈설명

 

이현규(李鉉圭)는 1874년 11월 16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石保面) 지경리(地境里)에서 아버지 이수단(李壽檀)과 어머니 진성이씨(眞城李氏) 사이에서 4남매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하현(夏玄), 호는 내산(奈山) 또는 우해(于海)였고, 이명은 능우(能雨)였다.

시조는 신라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고, 고려 때 원대손(遠代孫) 이우칭(李禹偁)이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본관을 월성(月城)에서 재령으로 쓰게 되었다. 13대조 진사(進士) 모은(茅隱) 이오(李午)는 고려 왕조가 조선 왕조로 바뀌자 벼슬을 하지 않고 개성(開城)에서 함안(咸安) 모곡(茅谷)으로 가서 은거하였다. 12대조 근재(謹齋) 이맹현(李孟賢)이 문과에 급제, 부제학ㆍ황해도 감사를 지냈고, 11대조 이애(李璦)가 경북 영해(寧海)에 처음 정착하였는데, 무과에 급제하고, 울진 현령 등 4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10대조 운악(雲嶽) 이함(李涵)은 문과에 급제한 후 의령 현감을 지냈으며,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영해(寧海) 인량(仁良), 지금의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인량리(仁良里)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영양 석보 입향조 9대조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강릉(康陵) 참봉을 지냈으나, 병자호란 이후 영양 수비(首比)ㆍ안동 대명동(大明洞)으로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 그 아래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평재(平齋) 이융일(李隆逸, 이현규의 8대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등 여러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은 외조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학문을 이어받은 당대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이었다. 7대조 이은(李檼)과 6대조 이문환(李文煥), 5대조 이우표(李宇標)에 이어 고조 이광겸(李光謙), 증조 이상호(李相昊), 조부 이규영(李葵榮), 아버지 이수단(李壽檀) 등도 가학을 이어 받으면서 혼반을 통하여 영양을 대표하는 명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조부 이규영은 안동권씨(安東權氏)와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이수단, 이수괴(李壽槐), 이수회(李壽檜) 삼형제를 낳았는데, 맏아들 이수단이 이현규의 아버지이다. 이수단은 외아들 이현규를 비롯하여 딸 셋을 두었다. 이현규는 안동권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면서도 재주와 지혜가 남달라 수업을 받으면 문득 뜻을 헤아리고 글을 지으면 뛰어난 구절이 많았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체격이 준수하고 장대하며 기상이 굳세어 무예를 익히니, 사람들이 문무를 겸비한 재목이라 일컬었다. 이현규는 운악 이함과 그 아들 석계 이시명의 곧은 충성과 높은 절개, 그리고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의 학문을 가학으로 이어 받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은 분노와 저항으로 넘쳐났다. 을사오적 처단 상소가 연이어졌고, 자결 순국자도 속출하였다. 또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영양에서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이 상경하여 조약이 무효라는 상소 투쟁을 벌이는 동안 이현규는 서둘러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5년 11월 청송 주왕산(周王山) 대전사(大典寺)에서 여러 뜻있는 동지들이 모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대장 이현규(李鉉圭), 중군장 신형일(申衡一)ㆍ류시연(柳時淵), 군량도감 김대규(金大圭), 도포수 권대성(權大聲), 집사 조완이(趙完伊) 등으로 진용을 편성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냈다.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점차 많은 의병들이 모여들자 청송 주왕산과 봉화 청량산(淸凉山) 등지에서 훈련과 대오(隊伍)를 갖춘 뒤 울진(鬱珍) 죽변(竹邊)으로 이동하였다. 이현규 부대는 1906년 2월 19일 울진으로 들어와 불영사(佛影寺)에 주둔하였다. 이때 이강년(李康秊) 휘하의 김현규(金顯奎)가 강원도 남부의 각 군을 돌며 의병을 독려하던 중, 울진에 도착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합세하였다. 또 삼척에서 활동하던 김하규(金河奎)와 강릉에서 활동하던 황청일(黃淸一)도 20여 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합세하였다.

이현규 부대는 이들과 함께 불영사(佛影寺)에 본부를 정하고 약 500명이 모인 가운데 영양ㆍ안동ㆍ청송ㆍ진보 4군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서 1906년 2월 영양군 입암면(立岩面) 교리(橋里)에서 의진을 편성하였다. 부서 책임자로는 의병대장 이현규(李鉉圭) 아래, 중군장에 류시연(柳時淵), 도포장에 김대규(金大圭), 소모장에 신형일(申衡一), 도포수에 권대성(權大聲), 집사에 조완이(趙完伊)가 각각 임명되었다.

1906년 2월 울진 근북면(近北面)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고하(古賀)로부터 총 1자루와 한화(韓貨) 60량을 확보하는 등 울진ㆍ평해 등지에서 군사와 무기를 모집하였고, 3월에는 의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울진 근남면(近南面) 매화리(梅花里)를 출발하여 죽변에 있는 일본 해군 망루를 기습하여 격파하고 수비병 3명을 사살하였다. 김현규는 4월 5일에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였고, 또 서면 삼근리(三斤里) 창고에 쌓여있던 봉화 토호 강재산(姜才山)의 소작미 100여 석을 희사 받아 군량을 확보하였다.

1906년 4월 진보(眞寶)의 장수령(長水嶺)에서 일본군 오장(伍長) 무등(武藤)이 이끄는 헌병 부대와 수차례 교전하였고, 진보 남쪽 ‘오누지’ 주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는 패하여 달아나는 무등(武藤) 부대를 파천면(巴川面) 어천(漁川)까지 추격해서 무등을 비롯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집사 조완이가 전사하고 이현규도 부상을 당하였다.

1906년 5월 이현규는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의병을 정비한 뒤 울진 죽변(竹邊)의 왜관(倭館)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당시 이현규는 영덕의 신돌석ㆍ영천의 정용기 부대와 제휴하여 경북과 강원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일제는 이현규를 붙잡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영양군 북방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도포장 김대규가 전사하고 이현규 자신도 부상을 당하였다. 결국 이 전투로 큰 타격을 입었다.

부하 한 명이 자수를 하고 뒷날을 다시 도모하자고 권하자 ‘차라리 제(齊)나라 의사 전횡(田橫)처럼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흉노에 항복한 위율(衛律)처럼 살겠느냐’라고 하며 그를 꾸짖었다 한다. 그 뒤 계속되는 일본군의 추격과 회유책, 그리고 고종황제의 해산 명령으로 하는 수 없이 1908년 봄, 부대를 해산한 뒤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牟津里), 지금의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진 3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70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는 등 후진양성에 힘을 쏟으면서도 재기를 준비하였다. 또 이 무렵 3년 동안 전국을 유람할 때, 선대의 고향인 경남 함안(咸安)의 13대조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기도 하였다. 모은 이오는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 담장을 쌓고 은거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이현규가 은거하자 일제는 그를 붙잡기 위해 온갖 난폭함을 서슴지 않았다. 정탐자를 풀어 수배하더니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집을 불태우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새골 친정으로 피신한 아내 권달(權達)을 붙잡아 가서 10여 일 동안이나 온갖 고문을 하고, 장인 권찬익(權燦翊)까지 붙잡아 끌고 가서 고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처가 식구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유랑생활을 하였다.

1917년 2월 3일 그는 총상의 여독으로 44세라는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아내는 고문으로 인한 병환과 일제의 감시로 무척 어렵게 살았지만 결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맏아들 이기호(李氣浩)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일본으로 갔으나 유해가 되어 돌아왔다. 안동의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이현규의 묘갈명(墓碣銘)에는 ‘아 공(公)은 충(忠)에 죽고 아내는 열행(烈行)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었다. 충효열 삼강이 공의 집에 모여 있으니, 세상에 그와 다시 짝할 만한 이가 있겠는가’라며 추모하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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