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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5. 7월의 독립운동가 주병웅
2015-06-28 11:09:19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1971

 

매국노를 섬멸코자 결사대 활동을 펴고 이끈 주병웅朱秉雄

 

□ 공훈개요

o 성 명 : 주병웅(朱秉雄)

o 생몰연월일 : 1883. 9. 12 ∼ 1924. 6. 2

o 주요 공적

∙1883년 울진군 죽변면 후정2리 출생

∙1911년 중국 길림성 유하현으로 망명

∙1917년 東省韓族生計會 발기인

∙1919년 27결사대 가입, 을사5적과 정미7적 처단계획

∙1919년 5월 5일 행적이 드러나 붙잡힘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 받음

∙1924년 6월 옥고를 치르다 순국

o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 공훈설명

 

주병웅 선생(1883~1924)은 경북 울진이 낳은 근 80명의 독립유공자 중 대표적 위치의 한 분이다.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호응하여 1911년 서간도로 망명 이주한 그는 이동녕·주진수 등 다수 지사들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준비 노선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에 그는 을사5적·정미7적 섬멸을 꾀하는 결사대의 일원이 되어 국내로 잠입하고 기회를 엿보며 자금조달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다 그만 일경에 피체되어 중형을 선고받았고, 평양감옥에서 복역 중 옥사 순국하였다. 그의 독립운동 행로를 이제 되새겨 보는 것은 망국의 치욕과 슬픔을 조국광복의 환희로 바꿔놓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국외망명의 길을 택했던 다수 울진인들의 고매한 독립정신을 추념하고 그 의기를 선양하려는 뜻이기도 하다.

 

1. 출생과 성장

주병웅은 개화와 척사의 두 흐름이 민족운동의 키잡이를 다투며 맞부딪치고 있던 1883년 9월 12일, 중부 동해안의 강원도 울진군 근북면 매정리(현재는 경북 울진군 죽변면 후정2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이름난 효행교수였던 독송獨松 주세창朱世昌을 중시조로 하는 신안新安 주씨 교수공파敎授公派의 30세손으로였다.

자를 무만畝萬, 호는 자운紫雲이라 했고, 독립운동기에는 주국영朱國英이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었다. 1881년생 전씨田氏와 결혼했으나 1907년 사별하여, 장경일張景日의 1892년생 딸을 다시 배필로 맞았다.

 

‘근북면’은 1914년 일제의 지방제도 개편 때 상군면·하군면과의 통합으로 삼화면三和面이 되었다가 1916년 울진면으로 개칭되었다. 해방 후 1953년에 면의 북동부를 관할하는 죽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6년에 죽변면으로 승격하였다. ‘매정리’는 마을 앞 용호정龍虎亭의 지형이 살포시 땅에 떨어져 앉은 매화 형상이라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었고, 훗날 이웃마을인 후당동 및 송정동과 합쳐져 ‘후정리’가 된 것이다.

 

소년기에 한학과 경서를 접하여 배웠던 주병웅은 20대 후반에 신교육을 2년여 수학했다. 울진읍내 건너 남쪽의 원남면(현 매화면) 매화리에 1908년 세워진 만흥晩興학교에서였다. 이 학교는 애국계몽 지사이고 신민회新民會 회원이던 주진수朱鎭壽/洙(1878~1936)의 주도로 1907년 10월에 설립 발기되어 이듬해 3월 개교하였다.

주진수도 죽변면 후정리 출신이며 교수공파 31세손이었다. 주병웅과 일문 친족이면서 한 항렬 아래였던 것이다. ‘자운’이라는 주병웅의 호는 주진수의 호 ‘백운’白雲과 짝을 이루니,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을지 짐작된다. 주병웅은 다섯 살 위의 주진수를 도와서, 처가 사람 전오규田五奎(珪) 등 여러 인사와 뜻을 모아 만흥학교 설립 발기에 동참하였다. 소박하나마 이것은 계몽운동의 일환이었고, 그의 민족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만흥학교 설립의 한 주역이었음과 아울러, 경술국치 직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어버릴 때까지 학생이기도 하였다.

기성면 사동리에도 주진수와 뜻을 같이하던 황만영黃萬英(1875~1939)이 1908년 3월에 설립한 대흥大興학교가 있었는데, 이 또한 1911년 폐교되어버렸다. 다만 1908년 9월 울진향교에서 세운 명동明東학교가 1912년에 울진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어 근대학교의 명맥을 어렵게 이었다.

 

주병웅의 청소년기이던 1890년대와 1900년대는 일본을 위시한 외세의 내정간섭과 침략위협으로 나라의 명운이 참으로 위태로운 시기였다. 개화혁신 및 애국계몽 계열 민족운동의 맞은편에는 반봉건 농민항쟁이 빈발했고, 반침략 의병운동도 일어나 지속되면서 기세를 높여갔다. 울진지역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연근해 어업 침탈을 일본이 무시로 자행함에 분개한 군민들은 의병 유진소留陣所를 설치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던 차 1896년 1월에 주병웅의 향리 인근에서 일본군에 의한 주민참살사건이 벌어졌다. 후포항에 염탐차 잠입한 일본인 선원 8명을 평해平海 유진소에서 발견하고 사살했는데, 그러자 일본해군 함선 1척이 죽변항으로 들이닥치더니 상륙한 군병들이 후당동에 들어와서는 전복기 등 주민 6명을 무단히 체포하여 죽인 것이다. 치졸한 보복극이자 명백한 민간인학살이었다.

이 사건이 14세 소년 주병웅의 마음에 가한 충격과 분노는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그 기억이 오래 남아서 강고한 항일의식의 한 원천을 이루었을 것임도 불문가지이다.

 

2. 서간도로의 망명 이주

애국계몽운동 참여로부터 시작된 주병웅의 민족운동 행로는 경술국치 이후의 서간도西間島 망명 이주로 이어졌다. 그 길에는 일족 내의 숙질관계 이상으로 늘 마음을 터놓고 교유하며 서로 믿고 따르는 사이이던 주진수의 선도先導가 있었다.

향촌유림이던 주진수는 1905년경에 상경하여 교유와 식견을 넓혀가던 가운데 깨우침을 얻고,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이 되었다. 일제가 기어코 한국을 강제 합병시킨 직후인 1910년 8월, 신민회 핵심간부인 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 등이 비밀회합을 갖고서, 독립운동기지를 압록강 너머 서간도에 건설키로 결의하였다. 그 계획을 서울에서 경신학교 한문교사 김도희金道熙로부터 전해들은 주진수는 9월에 혼자 서간도로 가서 현지시찰을 하고 돌아왔다.

얼마 후 그는 서간도의 토지 매입 및 한인이주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의 강원도 책임자(‘총감’摠監)로 지명되었고, 10만원의 자금 조달을 배정 받았다. 귀향하여 가산을 전부 매각 정리한 그는 1911년 1월 초순에 가족을 먼저 서간도로 보냈다. 이어서 황만영과 협력하여, 평해 황씨 해월공파海月公派 집안과 만흥·대흥 두 학교의 경영진 및 학생 중심으로 1백여 호의 만주 이주를 추진하였다. 또한 울진 쪽과 혼반婚班관계가 있던 안동安東의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에게도 이주를 권하여 성사시켜갔다. 그러던 그는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寺內총독 암살미수사건’(일명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1911년 2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경북에서 서간도로 몰래 이주해 간 인원이 1911년에 87명이더니, 1912년에는 1,920여 명에 이르렀다. 이주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이동녕 등이 전에 답사하여 보아둔 봉천성 유하현柳河縣(현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이었다.

『백하일기』에 의하면, 유하현 이도구二道溝에 사는 김대락의 집에서 1912년 2월 21일(음 1.4), 그와 이동녕·주병웅·전오규 등 여러 사람이 세례歲禮를 나누었다. 이보다 앞서 1911년 5월 중순에 주병의朱秉懿가 이도구에, 6월에는 주병륜朱秉輪이 추가가鄒家街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주병웅과 그의 일가친족은 1911년 상반기 중에 이주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간도에서 주병웅의 정착지는 유하현 제2구 오도구五道溝였다. 오도구에는 선산善山 출신의 순국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유족과 그 형제들인 허겸許蒹·허형許蘅 가족도 1916년부터 2년간 거주했다 하니, 주병웅과 그들 간의 교유도 있었다 하겠다.

 

3. 만주 땅에서의 초기 독립운동

출신배경 및 이주경위가 조금씩 다르면서도 일제통치에 대한 불복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공유하고서 서간도로 건너간 인사들은 합심 협력하여 주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와 인재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지체 없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2년 7월 출옥 후에 망명길을 떠나서 1913년 4월 유하현에 도착하고 추가가에 정착한 주진수와 함께 주병웅도 초기부터 그 사업의 추진주체 반열에 들어서 있었다.

 

『백운선생실록』에 의하면,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주진수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서 한인교포들을 규합하고 기사단·지인단·애국부인회·소년애국단 등을 조직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때 주병웅도 주진수를 따라 러시아에 들어갔다 한다. 하지만 1914년 8월 들어 러시아 당국이 블라디보스토크지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한인 민족운동을 탄압하며 지도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주진수도 주병웅도 이동휘李東輝처럼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주병웅은 1917년 말에 길림의 정안립鄭安立의 주도로 조직되기 시작한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의 149인 발기인 중 1인이 되었고, 거주지는 전과 다름없이 유하현이었다. 이 조직은 본부를 길림에 두고 동삼성東三省 내 주요 지역마다 분회를 두면서 북경의 중국정부에 대하여 한족 간민墾民 1백만의 대표됨을 자임하였다. 각종 산업 확장, 수전 개척, 은행 설립, 원왕冤枉 신소伸訴, 위난 구휼, 교육 발달 등의 비교적 온건한 사업을 표방했지만, 일제 당국은 이 조직이 독일 및 적노赤露와 일본의 충돌을 예상하고서 전자측에 가담하여 일본을 격파하고 국권회복을 달성함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독일의 패배로 귀결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에 끝이 났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종전 후의 식민지문제 해결 원칙으로 민족자결을 제창하였고, 그에 따라 세계질서 개조의 서광이 비치는 듯도 했다.

 

이에 재만 한인 독립지사들도 운동의 신국면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여러 방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21일에 광무황제(고종高宗)가 급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하여 1월 하순에 봉천(지금의 심양) 서소변문西小辺門 내 피영준皮永俊의 집에서 회합한 이동녕·이시영李始榮·안태국 등은 국장일을 기하여 매국노 5적과 7적을 암살 응징키로 합의하였다. 5적이란 을사늑약 체결을 주장하거나 찬동했던 5대신, 즉 박제순朴濟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이완용李完用을 일컫는 말이었다. 또한 7적이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의 퇴위를 강박했던 7대신, 즉 총리대신 이완용 외 임선준任善俊·고영희高永喜·이병무李秉武·조중응趙重應·이재곤李載堒·송병준宋秉畯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 국적國賊 무리도 내심이야 어떻든 국장 때는 나와서 장례 행렬을 배종陪從하게 될 터이니, 그 기회에 역적들을 일거에 격살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즐겨 마시던 식혜에 일본인들의 책략으로 독약이 섞인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나 있으니, 이번에 국적들을 제거 숙청하여 민족적 분노에 부응토록 함과 아울러, 민심을 격동시켜서 독립운동의 기세를 드높이자는 것이었다.

 

4. 국적섬멸 거사계획 가담과 피체

국적섬멸 암살계획 실행의 총책임은 평남 성천 출신의 신민회원이었고 유하현 대사탄大沙灘의 일신日新학교 교장을 지낸 이탁李鐸(1889~1930)에게 맡겨졌다. 그는 유하현 일대의 독립투사와 제자들 중에서 26명을 불러들여 모아서 결사행동대를 조직하고, 9명씩 3개 대隊로 편성하였다. 여기에 주병웅이 가담하였고, 대사탄에 살고 있던 울진 출신의 21세 청년 손창준孫昌俊도 대원이 되었다.

이탁이 직접 지휘하는 제1대는 주병웅·손창준 외 박진태朴鎭台(44세)·안경식安景植(33)·차병제車秉濟(21)·박기한朴基寒(34)·김용우金容友(35)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19년 2월 24일 봉천을 출발하여, 25일 안동역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26일 새벽에 서울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3월 3일 국장일에 반우返虞(장사 지낸 뒤에 그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일) 행렬이 통과할 망우리忘憂里 고개에 매복해 있다가 거사를 결행할 계획이었고, 특히 이완용·송병준·이근택·조중응·이지용·윤덕영·이병무 7인을 지목하여 주 표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사는 예정일에 결행되지 못하였다. 봉천에서 대원 이종욱李鍾郁이 갖고 오기로 한 무기류의 도착이 지체된 때문이었다. 3월 10일경에야 권총 6정과 탄환 250발 및 단도 1개가 도착하였고, 15일경에 권총 2정이 추가 입수되었다. 이탁은 이들 무기를 대원들에게 나눠주고 기회를 다시 엿보도록 하고는 유하현으로 돌아갔다.

 

3월 20일경에 대원들은 독립문 꼭대기에 양각되어 있는 태극기가 잘 보이도록 색칠을 하고, 성토문·경고문·격문 등을 만들어 독립문과 종각鐘閣 등 여러 곳에 붙여놓았다. 그런 잠행활동의 비용과 대원들의 숙식비 등 여러 용도의 자금이 필요해졌으므로, 그 조달 활동도 은밀히 개시하였다. 이 일에 주병웅이 지휘자 역할을 했고, 이우영李宇榮(52)·이기원李基源(38) 등 5명을 협조자로 포섭하였다.

후자의 조언에 따라 주병웅은 손창준과 차병제에게 무교동의 박홍일朴泓鎰 집으로 가서 자금기부를 요구하여 돈을 받아내도록 지시하였다. 권총을 휴대하고 박홍일의 집을 찾아간 두 사람은 박을 겁박하여 470원을 받아냈고, 인사동의 한봉취韓鳳翠에게서도 같은 식으로 120원을 받아냈다. 박진태와 이기원이 찾아간 효자동의 김종환金鍾煥(3.31)과 돈의동의 김종근金宗根(4.26)은 집에 현금이 없다 하므로, 기일을 정하고 각 5백원과 3천원 조달 제공을 약속 받았다.

이렇게 4월 중에 수차 기도된 군자금 징수 활동이 결국 일경에 제보되고 행적이 노출되어, 5월 5일부터 23명의 대원이 속속 체포되고 말았다. 3명의 대원만이 검거망을 빠져나가 5월말에 유하현의 본부로 귀환할 수 있었다.

 

5. 법정투쟁과 순국

피체된 대원들은 1년 3개월여 동안의 구금 상태에서 가혹한 취조를 받고 예심을 거쳐 주병웅 등 16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김용우·박기제朴基濟 등 7명은 면소되었다. 1921년 1월 7일부터 이틀간 경성지방법원에서 제1회 공판이 열려서, 사실심리와 김우영金雨英·호리堀 두 변호사의 변론이 진행되었다. 공판검사 기요境는 재판부에 중형 선고를 주문하였다.

1월 19일에 재판장 이도오伊東는 이탁(궐석) 12년, 손창준·차병제 10년, 주병웅·박기한·이우영 8년, 박진태·이기원 6년, 안경식 2년의 징역형을 언도하였다. 안경식만 빼고는 전원이 구형대로였다. 주병웅과 박진태·이우영·이기원 등 4명은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1921년 3월 4일의 경성복심법원 항소심 공판에서 요시다吉田 재판장이 ‘강도’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이에 주병웅은 소리 높여 말하며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나를 강도라고 함은 원체 당치않은 말이다. 그 돈을 강탈하는 것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일이다. 내가 목적하던 바 나라의 공적公敵을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라에 불충했다는 죄명으로 징역을 준다면 8년 아니라 80년의 선고를 받을지라도 원한이 없으나, 만일 강도라 하면 불복이다.”

 

이 반론은 기소 죄목과도 얼마간 관련이 있었다. 검사국 송치 때 주병웅에게는 차병제·손창준·박진태와 함께 살인예비·강도예비 및 강도죄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예심판사는 후3인에게 살인예비 및 강도죄를 적용하여 기소한 반면, 주병웅에게는 살인예비죄를 증거불충분으로 면소하고 강도죄만 적용했던 것이다.

최후 진술에서도 주병웅은, “억지로 징역을 시킨다하면 할 수 없이 받기는 할 터이나, 실상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전체 원수를 죽이고자 한 것이요, 결단코 강도의 행위를 한 일은 없으니 다시 심리해보기 바란다.”고 공박해 말하였다. 이기원도 “나는 의사義士이지 강도가 아니다.”고 크게 외쳐 항변하였다. 그러했음에도 3월 11일의 선고공판에서 4인 전원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상고를 포기하여 8년형이 확정된 주병웅은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 피체 입옥 5년 만인 1924년 6월 2일(음력 5.1), 불행히도 옥사 순국하였다. 그의 사인을 말해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데, 고문 후유증과 관계있을 모종의 숙환 때문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6. 27인 결사대 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주병웅의 위치

세칭 ‘이완용 암살단’이라고도 했던 27인 결사대의 국적섬멸 거사계획은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3·1운동 이후의 의열투쟁사 첫 페이지에 기록되어 마땅한 일대 항일의거요, 1919년 말부터 만주지역의 다수 독립운동단체와 그 조직원들이 감행하기 시작한 국내진입 의거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약육강식의 ‘근대적’ 질서에 맞서는 최후 보루로서 ‘유구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발현이기도 하였다. 그 거사가 계획대로만 실행되어 성공했다면, 일신의 영화를 위해 감히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무리와, 동족을 저버리고 강대 외세의 노예로 갖다 바침에 거리낌이 없는 민족반역자 부류의 추악한 행동과 불의한 선택은 응당 그 값을 치르고 냉엄한 역사적 단죄를 받게 되고야 만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독립운동의 전체 지형은 물론이고 20세기 한국사의 진로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 역사적 교훈의 힘으로 해방 후 한국에서 ‘친일파’(정확히는 부일배附日輩) 세력을 완전 숙청하고 일제지배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여 진실로 민족사적 정의가 되살려져 구현되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실현되지 못한 채 반反사실적 상상으로 그치고, 한갓된 비원悲願으로만 남아 있다. 슬프고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올해 2015년에 한국의 지배층과 각종 기득권층은 자기의 뿌리가 어디인지 한 번 되돌아보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자숙할 자는 자숙함이 마땅하다.

 

이렇듯 뜻 깊은 의거를 감행하려 했던 27인 결사대의 일원으로서 주병웅은 무기를 갖춘 뒤의 암살거사 준비와 자금조달 과정에 부대장副隊長 혹은 사실상의 후임 대장이 되어 입경 대원들을 총지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민족독립의 제단에 바쳐진 그의 분투와 공훈과 값진 희생을 기리어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후일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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