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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5.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2015-06-03 15:55:20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1582

 

6·10만세운동  총기획자  권오설

 

□ 공훈개요

o 성 명 : 권오설(權五卨)

o 생몰연월일 : 1897. 12. 18~1930. 4. 17

o 주요 공적

∙1919년 3‧1운동 참가, 원흥학술강습소 설립

∙1920년 안동청년회‧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입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25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책임자

∙1926년 6‧10만세운동 추진 총책임자

∙1928년 징역 5년형 선고받음

∙1930년 옥중 순국

o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2005년)

 

□ 공훈설명

1. 3‧1운동에 참여하다

권오설은 1897년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에서 권술조(權述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막난(莫難)이다. ‘오설’은 어릴 적 이름이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권일(權一)‧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펼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사장을 지낸 권오직(權五稷)이 그의 동생이다.

권오설은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하고, 1907년부터 남명학교(南明學校)와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신식교육을 받았다. 동화학교 졸업 후 가난 때문에 곧장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였다. 1916년 지인의 도움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내문제로 중퇴하였다. 서울로 가서 중앙고등보통학교와 경성부기학교(京城簿記學校)에 다녔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곧 그만두었다.

1918년 지인의 소개를 받아 전남도청 고용원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목포에서 6개월 형을 받고 복역했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2.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다

권오설은 석방된 뒤 귀향하여 마을 아이에게 새로운 문물을 가르치기 위해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설립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활동 범위를 넓혀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 1922년 풍산면에 풍산학술강습회(豊山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 이때 그의 교육활동으로 양성된 인물들은 이후 안동은 물론 전국 사회운동에서 많이 활약하였다.

그의 활동은 교육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안동청년회‧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풍산청년회 등의 결성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 들였다. 그는 안동에서 일본인 지주가 고리대금으로 짧은 시간에 대지주가 된 반면 고향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사회제도의 결함 때문이며, 사회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923년 권오설은 이준태‧김남수 등과 함께 풍산학술강습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주축으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 풍산소작인회는 소작인의 권익 옹호와 함께 신분제 철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던 봉건적 신분질서의 철폐운동 등을 펼쳤다. 예천에도 출장소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확대하여 전국의 대표적인 농민조직으로 성장하였다.

1924년 권오설은 풍산소작인회의 대표 자격으로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안동을 떠나 전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고, 곳곳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파업 등을 지도하면서 전국적인 활동가로 발돋움하였다.

 

3. 6‧10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권오설은 1925년 4월 17일 창당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과 당의 청년 전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중앙집행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주요 활동은 청년‧학생들을 규합하고,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모스크바에 설립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일이었다. 유학생 중에는 동생 권오직과 같은 고향의 안상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같은 해 11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와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이준태와 함께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을 이끌었다.

1926년 권오설은 노동절을 맞이하여 사회운동단체와 연합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4월 순종(純宗)이 사망하고 민중의 애도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는 김단야(金丹冶)와 협의하여 순종의 장례일에 3‧1운동처럼 대규모 시위를 펼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는 ‘6‧10투쟁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른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 결과 천도교 구파 세력은 격문을 인쇄하고 지방과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학생들을 조직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이끌어내기로 결정하였다.

만세운동 준비가 진행되던 중 격문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6월 7일 권오설이 체포되었다. 시위가 무산될 위기를 맞았으나, 그동안 권오설과 다른 세력의 철저한 준비로 6월 10일 만세운동이 계획대로 일어날 수 있었다. 만세운동에서 시위를 이끌어낸 이선호(李先鎬)를 비롯한 안동 출신 학생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4. 옥중 순국하다

권오설은 체포된 후 조사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관련자들과 함께 고문을 자행한 일제 경찰을 고소하였다. 이 사건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연일 신문에 보도되었고, 전국에서 고문을 성토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권오설은 1928년 2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권오설은 일제에 맞서 한 치의 타협도 없이 투쟁을 전개한 투사였지만, 부모와 형제에 대한 정이 각별하였다. 투옥 중 그가 보낸 편지에는 장남으로서 집안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 부모에 대한 효심, 형제 사이의 우애가 절절히 배여 있었다. 출옥 100일을 앞둔 권오설은 1930년 4월 17일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날은 바로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지 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권오설의 생애는 짧았지만, 독립과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거침없는 삶이었다. 그의 눈부신 활동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어 그 업적을 뒤늦게 인정받았다.

 

□ 참고문헌

김도형 외, 『근대 대구 경북 49인』, 혜안, 1999.

김희곤 외, 『안동 가일마을』, 예문서원, 2006.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권오설』1‧2, 푸른역사, 2010.

장석흥, 「권오설의 민족운동 노선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1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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