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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5. 4월의 독립운동가 엄순봉
2015-04-09 09:40:23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020

’15. 4월의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장 엄순봉

 

□ 공훈개요

◦ 성 명 : 엄순봉(嚴舜奉)

◦ 생몰연월일 : 1906 〜 1938. 4. 9

◦ 주요 공적

∙1906년 영양 대천리 출생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가입

∙1932년 남화한인청년연맹 가입

∙1933년 육삼정의거 참가, 친일파 옥관빈 처단

∙1935년 친일파 이용로 처단

∙1936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음

∙193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 공훈설명

 

의사義士 엄순봉嚴舜奉은 1906년(일설에는 1903년) 영양군 영양면 대천동大川洞 옥산리玉山里 962번지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순봉은 아명이고 본명은 형순亨淳이었으며, “가을 나무처럼 낙엽으로 세상에 거름을 준다.”는 뜻인 ‘추수秋樹’라는 호를 지어 가졌다. 중국에서는 여평흔余萍痕이라는 가명도 썼다.

 

집안이 빈궁하여 초등교육도 이수하지 못한 채 농사를 돕고 짓던 그는 1923년경(혹은 1925년 9월) 만주로 건너갔다. 북만주 길림성의 해림海林 근처에 정착한 그는 수년간 농사를 지었고, 때로 농장노동에 종사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는 무장독립운동의 맹장이요 신민부新民府의 지도자인 김좌진金佐鎭과 친교를 맺었다. 김좌진은 엄순봉의 인품과 도량에 감탄하여, 청년지도자의 일원으로 대우하며 아꼈다.

 

김좌진·이청천李靑天·황학수黃學秀 등의 신민부 군정파軍政派는 1929년 7월 해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의 제휴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전자의 조직은 같은 달에 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백정기白貞基·이달李達 등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운동자들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코자 결성한 것이었다.

엄순봉은 두 조직에 다 참여하였다. 총연합회는 농촌자치조직 건설과 교육활동 전면화에 주력했는데, 엄순봉은 차장 직을 거쳐 청년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0~31년 사이에 김좌진·김종진·김야운金野雲·이준근李俊根이 연이어 공산주의자들에게 암살되는 참극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총연합회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어버렸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9·18 만주사변’)으로 기왕의 활동이 난관에 처하자 10월 초순경에 엄순봉은 백정기·오면직吳冕稙·정화암鄭華岩·김지강金芝江·이달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함께 만주를 떠나 북경을 거쳐 상해上海로 갔다. 11월경에 엄순봉은 상해 인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인 아나키스트 지도자 류자명柳子明의 인도와 생도인 중국인 상얼캉常爾康의 알선으로 남상 바로 곁의 남당南塘에 자리 잡고 채소 재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류자명·상얼캉과의 교유를 통해 아나키즘 이론을 깊이 학습하고 수용해 갔다. 그가 이해한 바의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와 절대로 존중되고 사회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모든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민중의 자유연합 사회를 성취해내며 일체의 재산은 사회가 공유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1932년 12월 중순경, 엄순봉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연맹은 앞서 1930년 4월 상해에서 류기석柳基錫·류자명 등의 주도로 조직된 아나키스트 혁명결사였다.

1931년 10월말에 청년연맹은 중국인 왕야차오王亞樵와 화쥔시華均實, 일본인 사노 이치로佐野一郞 및 이토伊藤 등과의 합작 제휴에 의해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하였고, 이에 가입한 한인 맹원들은 행동대 역할을 전담키로 하였다. 엄순봉도 항일구국연맹의 조직원이 되었음과 아울러, 극비 행동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의 한인 단원 8인 중 1인이 되었다.

1933년 3월에 엄순봉은 남상을 떠나 상해의 프랑스조계로 가서 복이리로福履理路 정원방亭元坊 6호의 맹원 정해리鄭海理의 집 2층에서 백정기 등 여러 동지들과 합숙하기 시작하였다. 그 직후 그는, 거금을 들여 항일운동 무력화의 정치공작을 획책하고 있던 주중駐中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기도(세칭 ‘육삼정六三亭 의거’)의 준비 논의에 참여했다. 백정기와 이강훈李康勳이 투탄행동 요원으로 나선 이 거사는 안타깝게도 사전 정보누설로 인해 실행 직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행동은 상해 한인사회 내부의 적, 그러니까 악성 친일분자와 직업적 밀정, 사리사욕에 눈먼 밀고자 등을 처단하여 척결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우선은 김구金九의 오른팔 격 인물인 안공근安恭根의 처조카이면서도 일본 총영사관의 밀정 노릇을 몰래 하고 있던 이종홍李鍾洪을 1933년 5월에 맹원들이 처단하였다. 남상 입달학원에서 정화암·오면직·김지강·안경근安敬根과 함께 엄순봉이 회합하여 이종홍을 제거키로 결의하고, 엄순봉·오면직·이달·이용준李容俊이 처단을 맡아 실행하였다. 안경근이 이종홍을 창얼캉의 집으로 유인해오니, 4인 맹원이 그를 삼끈으로 결박하고 엄히 문책하여 모든 죄상을 자백 받고는 교살絞殺 매장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는 친일분자 제거에 나섰는데, 그 시범사례가 된 것이 1933년 8월 1일의 옥관빈玉觀彬 저격 처단이었다.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겪은 후 상해로 건너간 옥관빈은 임시정부 초기부터 밀정이라는 소문이 났었거니와,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던 중 일제 관헌과 내통하여 2만원 상당의 군용품을 기부하고 반대급부의 지원을 받으며 축재하였다. 그런 한편으로는 중국국민당 상해시당부와 상해시민연합회에 관계하면서 제약회사 불자대약창佛慈大藥廠도 경영하여, 지역 내 재계·언론계·불교계에 두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업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흥사단興士團의 거물 단원이면서도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방하고 중국의 군사·정치도 은밀히 정탐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이에 김구·안공근·정화암 3자가 대좌하여 옥관빈을 제거키로 합의하고, 남화연맹이 실행을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엄형순이 직접 거사자로 선임되었다. 옥관빈이 프랑스조계 망지로望志路 남영길리南永吉里의 사촌형 옥성빈玉成彬의 집에 은밀한 용무로 종종 출입한다는 사실이 포착되었으므로, 오면직이 그 맞은 편 중국인 집 2층에서 열흘 동안 잠복하면서 기다렸다. 마침내 8월 1일 밤, 옥관빈이 나타나자 오면직의 연락을 받고 급거 출동한 엄형순이 옥성빈의 집 후문으로 나오는 옥관빈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남화연맹은 8월 8일, ‘적의 주구走狗’요 ‘간역奸逆’이어서 ‘가살可殺’인 옥관빈의 죄상을 9개 조목으로 나열하여 폭로하는 「참간장斬奸狀」을 ‘한인제간단韓人除奸團’(이명 ‘서간단鋤奸團’) 명의로 작성하여 상해의 신문사들에 보내서 실리도록 했다.

 

옥성빈도 그 해 12월 18일에 피격 암살되었다. 프랑스조계 공부국工部局 경찰서의 한인계 형사로 재직 중이면서도 독립운동에 협조하지 않고 배반한 혐의로 그리 된 것일 터라는 추측이 나돌았지만, 정확한 이유와 저격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옥성빈이 옥관빈 암살의 범인을 잡겠다고 여러 달 밀탐하고 있었는데, 그런 동정이 남화연맹에 포착되어 벌어진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1936년 5월 28일자 및 31일자의 『동아일보』 지면에 이 사건이 ‘엄순봉과 이규호의 소행이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경찰취조 결과를 전한 것일 뿐이고, 양인에 대한 판결문에는 다른 사건과 달리 이 사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따라서 저격자가 누구였는지 확실히 판명된 것은 아니라 하겠다.

 

2년 후인 1935년 1월 21일 아침, 엄순봉은 프랑스조계 하비로霞飛路 보강리寶康里의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습격했다. 한때 임시정부 요인이었으나 언젠가부터 일제 당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알려진 조목사를 응징하는 한편 남화연맹의 운동자금을 조달코자 해서였다. 이달·김지강과 함께 권총 1정씩을 휴대하고 이규호李圭虎(=이회영李會榮의 3자인 이규창李圭昌)의 길 안내를 받아 거사행동에 나선 엄순봉이 조상섭의 2층으로 올라가보니, 조는 이미 낌새를 눈치 채고 달아나버려서 없었다. 그래서 목적 달성에는 실패하였다.

 

1935년에 일어난 이용로李容魯 암살사건도 독립운동 방해자 처단활동의 일환이었다. 이용로가 일제의 앞잡이 조직과도 같은 재상해 조선인거류민회의 부회장이 되더니, 일본 총영사관과 결탁하여 재류 한인들 모두 민회에 가입토록 압박하고, 독립운동자들의 동정 및 주소 등을 낱낱이 영사관에 밀보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3월 17일, 엄순봉과 이달·이용준이 함께 한 자리에서 정화암이 이용로를 처단 응징할 것을 역설 제창하니 모두 그 의견에 찬동했고, 김지강이 합류하여 황포강黃浦江 기슭 어가만산魚家灣山에서 구체적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실행 담당자는 2명으로 하기로 하고, 엄순봉이 우선 자원하였다. 그리고 중국어에 능한 이규호가 길 안내와 망보는 역할을 제의 받고 승낙하였다.

3월 23일, 엄순봉은 실탄 장전된 권총 2정을 정화암에게서 건네받고 이규호와 함께 공공조계 적사위로狄思威路 유신리裕新里 16호의 거류민회 사무실 2층에 위치한 이용로 거소의 모양과 부근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마침내 3월 25일, 오전 6시경에 채시로菜市路 순양리順陽里 12호의 임시 아지트에서 출발한 엄순봉과 이규호는 7시 30분경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규호는 인근 야채시장 광장에서 망을 보도록 하고 혼자 2층으로 올라간 엄순봉은 거실로 돌입하여 문짝을 발로 차서 열고는, 침상에 누워 있는 이용로를 겨누어 권총 2발을 쏘아 뒷머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는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려는데, 이용로의 처 박성신朴聖信과 동거인 박숭복朴崇福이 엄순봉을 붙잡고 식도로 후려쳐 부상을 입히고 고성을 질러댔다. 겨우 뿌리친 엄순봉이 적사위로 큰길을 향하여 내달렸는데,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온 중국인 순경에게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그를 도와주려고 달려나온 이규호도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버렸다. 이용로는 그날 밤 0시경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인계되어 모진 심문을 받고 5월 27일 서울로 압송된 두 사람은 종로경찰서의 취조를 거쳐 8월말에 검사국 송치와 더불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미수, 살인, 살인예비, 살인미수 등의 다중 죄목으로 유죄 선고와 함께 엄순봉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즉시 항소하였고, 미성년자라 하여 징역형이 언도된 이규호는 검사가 항소하였다.

동년 4월 24일의 경성복심법원 공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사형이 언도되었고, 이규호는 13년 징역형을 받았다. 엄순봉은 관선변호사의 권고대로 고등법원에 상고했는데, 상고 이유는 형량 감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심한 고문에 의한 허위조서 작성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재판부의 사실 오인, 그리고 이용로 암살의 동기 및 행동 내용에 관한 오판에 항변키 위해서였다. 하지만 동년 10월 15일, 상고 기각으로 사형판결이 확정되었다.

 

2년 후인 1938년 4월 9일, 일제 당국의 형 집행으로 엄순봉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민족에 바치는 죽음을 맞았다. 집행관 형리의 전언에 따르면, 엄순봉은 형장으로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황하거나 초조한 기색이 일절 없었으며, 최후에는 “대한 만세”와 “무정부주의 만세”를 삼창하고 운명했다 한다. 1930년대의 상해지역에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전개한 항일 의열투쟁―밀정 및 친일패류親日悖類 등의 불의분자不義分子 처단에 집중되었던―의 행동 중심에 섰던 불굴의 투사 엄순봉의 실로 의사다운 당당한 모습이었다.

정부는 엄순봉 의사의 거룩한 일생과 숭고한 희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엄순봉 판결문(1936년 형공刑拱 제95호).

엄순봉 판결문(1936년 형상刑上 제92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 11(의열투쟁사 자료집), 1976.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민족해방투쟁』, 형설출판사, 1978.

김후경, 『대한민국 독립운동 공훈사』, 광복출판사, 1986.

이규창, 『운명의 여신』, 보련각, 1992.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조동걸, 『선열의 길과 유적』, 역사공간, 2010.

김희곤 외, 『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김영범, 「‘아나키스트 의열투쟁’ 범주의 성립과 그 의의」, 『대구사학』 115, 2014.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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