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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5. 2월의 독립운동가 최해
2015-02-08 14:31:14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440

 

’15. 2월의 독립운동가 단사 최해

 

□ 공훈개요

◦ 성 명 : 최해(崔海)

◦ 생몰연월일 : 1895. 2. 17 〜 1948. 8. 11

◦ 주요 공적

∙1895년 경북 울진 원남면 덕신리 출생

∙1915년 만주 신흥무관학교 졸업 및 교관

∙1919년 김좌진과 북로군정서 조직

∙1920년 북로군정서 여단장으로 청산리전투 승리

∙1923년 연길현에서 고려혁명군 조직(부관)

∙1931년 이후 대종교로 민족의식 고취

∙1945년 광복되자 귀국하여 대동청년단 훈련대장 맡음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77년)

 

□ 공훈설명

 

1. 만주 이주와 신흥무관학교

 

1) 서간도로 이주하다

최해(崔海, 1895.2.17〜1948.8.11)는 호가 단사(檀史)이며, 이름은 원래 해일(海日)이었지만, 중국에서 이름을 해(海)로 사용하였다. 그는 1894년 경북 울진군 원남면 덕신리에서 경주최씨 최덕삼(崔德三)과 김해김씨 김덕촌(金德村)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래로 해출(海出)‧해중(海中)‧해수(海水) 등의 아우를 두었다.

그가 태어난 원남면 덕신리는 해안가의 마을이었는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어업과 농업을 겸하여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다. 그는 울진군 평해면 월야동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대일(金大一)의 딸 김아지(金阿只, 1892〜1968.8)와 1910년 9월 27일 결혼하였는데, 곧이어 국권이 강탈되자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슬하에 아들 최일랑(崔一郞, 일명 崔碩羽, 1924)‧차랑(次郞, 일명 崔起龍, 1935)‧삼랑(三郞, 1935〜1944) 3형제와 딸 최숙자(崔淑子, 1931)를 두었다.

최해의 서간도 이주는 울진출신 주진수(朱鎭壽)와 황만영(黃萬英)의 서간도 이주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일찍이 계몽운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원남면 매화리 출신의 주진수는 1908년 3월 매화리에 사립 만흥학교(晩興學校)를 설립하였고, 기성면 사동리 출신의 황만영은 1908년 3월 사동리에 사립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였다.

일찍이 상경하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주진수는 1910년 8월 신민회에서 추진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듣고 황만영을 비롯한 울진지역의 인사들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최해의 경우에도 주진수로부터 이주 계획을 듣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최해가 살았던 원남면 덕신리는 주진수가 살았던 원남면 매화리와 황만영이 살았던 기성면 사동리의 중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진수가 설립한 만흥학교의 졸업생 곽종욱(郭鍾郁)‧주대근(朱大根)‧진규환(陳奎煥)‧황의영(黃義英)‧황진환(黃鎭煥)‧윤인보(尹仁甫)‧장식(張植)‧황병문(黃炳文)‧전오규(田五圭)‧주병웅(朱秉雄)‧남재수(南載洙)‧윤병헌(尹炳憲)‧주병륜(朱秉輪) 등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최해의 경우 만흥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이들과 같은 시기에 서간도로 이주했던 것이다.

최해는 1910년 9월 27일 결혼한 뒤 곧 사간도로 이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이때의 상황을 그의 아들 최기룡은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獨立戰爭)과 최해(崔海)〉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는 동제 고목나무 밑에서 못가겠다고 몇 번이나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이미 허사였고, 남부여대하여 죽변항에 이르러 조그만 배에 타서 함경도 원산까지 가서 육로 길을 걸어 두만강을 건너 목적한 북간도 유하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최해와 그의 부인 김씨는 죽변항에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갔다. 그리고 원산에서 육로를 이용하여 두만강을 건너 서간도의 유하현에 도착하였다. 이들 부부는 ‘미개간 옥토가 많았으며 울창한 수목하며 개간만 하면 곡식이 안 되는 곳이 없다’는 서간도의 유하현에서 새로운 생활터전을 잡게 되었으며 내일의 희망을 걸게 되었다.

 

2) 신흥강습소에 입학하다

최해는 부인과 함께 유하현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신흥강습소에 입학하였다.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 등 신민회의 회원들이 1911년 여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민단적 성격을 띤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독립군 무관 양성을 위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11년 가을 큰 흉작으로 경학사를 해체하고 1912년 가을 새로운 한인 자치기구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그 본부를 합니하(哈泥河)로 옮겼는데, 신흥강습소도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합니하로 이전한 신흥강습소는 1913년 5월 교사 낙성식을 갖고 그 명칭도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칭하고 군사반(軍事班)을 두었다. 그러나 각처에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본교를 고산자로 이전하여 고등군사반을 설치하였고, 합니하에는 초등군사반(初等軍事班)을 두고 분교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 후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여 개교하였다.

신흥강습소는 1911년 제1기 졸업생 50여 명을 배출한 이래 1913년 제2기 48명, 제3기 178명, 그리고 1915년부터 1920년까지 6년간 합니하(哈泥河) 분교 및 고산자(孤山子) 본교, 그리고 각처 분교를 졸업한 2876명을 포함하여 모두 3,253명을 배출하였다.

최해는 울진출신의 黃炳禹(2)‧黃炳日(2)‧黃炳湯(2)‧朱大根(3)‧李圭東(4)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 고등군사반을 졸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서 황병우‧황병일‧황병탕은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출신의 황만영(黃萬英)과 함께 유하현으로 이주하여 신흥강습소를 졸업하고 신흥강습소의 주역이 되었으며, 주대근은 원남면 화매리 출신으로 사립 만흥학교를 졸업하고 서간도 유하현으로 이주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규동은 평해읍 직산리 출신으로 5형제가 아버지 이희영을 모시고 유하현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를 졸업하고 1917년 해룡현(海龍縣) 오인반(五人班)에서 부민단 지부를 맡았고, 1918년 길림성 영길현 신안촌(新安村)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최해는 1915년 제4기로 졸업하였다. 신흥강습소를 졸업한 최해는 서간도에서 독립운동 간부로 활동하였고, 부인 김해김씨 김아지는 농사를 지었다. 이때의 상황을 그의 아들 최기룡은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獨立戰爭)과 최해(崔海)〉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이시영씨가 세운 신흥무관학교가 있어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독립군의 간부로 활약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어머니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말이 개간이지 황무지를 개간한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고초를 겪어야 하였으며, 남자도 아닌 여자의 몸으로서 그야말로 눈물겨운 고난을 겪고 이끌어 나가 조와 수수‧감자 등의 농작물은 풍작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때의 기쁨은 평생 잊지 못하였다 합니다.

 

최해는 1917년 4월 손일민(孫逸民) 등과 함께 화전현(樺甸縣) 두도하자(頭道河子)에 있는 길창학숙(吉昌學塾)에서 한인 약 100여 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독립운동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최해는 1917년 11월 길림에서 정안립(鄭安立) 등이 발기하여 조직한 한족생계회(韓族生計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족생계회는 1918년 4월 길림에 있는 정안립의 집에서 일본을 격파하고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취지를 표방하고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임원으로 여준(呂準, 회장)‧서상용(徐相庸, 부회장) 등이 선출되었고, 최해는 평의원(評議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서간도 한인 교포사회에서 지도적인 독립운동가로 성장하였다.

 

 

2. 북로군정서의 조직과 청산리 독립전쟁

 

1) 북로군정서의 여단장이 되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한족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부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명함과 동시에 북간도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명명하도록 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중광단(重光團)‧정의단(正義團)‧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발전시킨 독립군 단체이다. 1911년 길림성 왕청현에서 설립된 중광단(重光團)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1919년 8월 7일에는 독립군 단체로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편성되었다.

1919년 8월 정의단은 김좌진(金佐鎭)을 초빙하여 북로군정서의 조직과 훈련을 의뢰하였다. 이에 김좌진은 왕청현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 일대에 본영을 설치하고, 신흥무관학교에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李範錫)과 졸업생인 장교들을 초빙하였다.

이때 최해는 강화린(姜化麟)‧김춘식(金春植)‧박영희(朴寧熙)‧백종렬(白鍾烈)‧오상세(吳祥世)‧이운강(李雲崗) 등과 함께 파견되어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나아가 최해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여단장(旅團長)에 임명되었다.

 

북로군정서임원

 

總 載 徐 一

總司令官 金佐鎭

參謀長 李章寧

師團長 金圭植

旅團長 崔 海

聯隊長 鄭 勳

硏成隊長 李範奭

經 理 桂 和

吉林分署顧問 尹復榮

軍器監督 梁 玄

 

북로군정서의 여단장 최해를 비롯한 교관들은 신흥무관학교로부터 각종의 교재를 공급받고, 서대파 십리평으로부터 약 30리(12km)의 산림지대에 8동(棟)의 병영을 짓고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간도 일대에서 장정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편성함과 동시에 정예군을 만들기 위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2)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여하다

북로군정서는 간도지방 독립군 부대 중에서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막강한 부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한국군 장교 김규식(金奎植) 등이 참가함으로써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사기(士氣)와 지휘력(指揮力)은 더욱 증강되었다.

1920년에 들어와서 북간도 지역 독립군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우선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5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군사통일과 연합작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1920년 5월 3일 북간도의 신민단(新民團)‧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광복단(光復團)‧국민회(國民會)‧의군부(義軍府) 등 6개 독립군 단체는 무장독립운동에 상호연합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결과 국민회는 5월 27일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국민회군(國民會軍)‧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를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다.

봉오동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6월 21일 제2차 연합회의, 1920년 7월 1일 제3차 연합회의를 거쳐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간도와 노령의 모든 독립군 단체들이 국민회 주도하에 통합되었다.

한편, 일제는 봉오동전투의 패전과 독립군이 더 성장하기 전에 토벌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압력에 굴복한 중국군의 출동으로 인한 독립군 부대들의 근거지 이동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10월 초 만주출병을 단행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본거지인 간도지방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무자비한 한국인 학살 작전을 벌였다.

이에 모든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를 옮겨 산간의 안전지대로 이동해야만 했다. 홍범도‧안무 등이 대한북로독군부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중국 관헌의 권유를 받아들여 장백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하고 이동하였다. 홍범도와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장백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화룡현 이도구(二道溝)와 삼도구(三道溝)의 청산리 일원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었다.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萬麒溝戰鬪) 등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이른바 청산리 독립전쟁이다.

최해도 이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독립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북로군정서의 전투조직이나 관련기록에서 최해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초창기 북로군정서의 여단장(旅團長)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최해에 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들 최기룡의 회상기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獨立戰爭)과 최해(崔海)〉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싸움에서 아버지는 김좌진사령관을 위시하여 혈전을 지휘하였으며, 어머니는 후방에서 독립군의 밥을 지어 주먹밥을 공급하여 주었으며 생사를 무릅쓰고 또한 부상병들을 간호, 치료 등을 맡아 하였습니다. (중략) 한 여성으로 태어나 남의 아내가 되어 상상도 못한 독립군의 아내로서 또는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어떤 일에도 불굴의 투지로서 싸워 이겼으며 그야말로 남자도 감당 못할 일을 치러왔던 것입니다.

 

위의 회상기 외에 최해의 청산리 독립전쟁 참여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청산리 독립전쟁 이후 소련으로 넘어가 참변을 당했던 독립군이 다시 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을 조직할 때, 최해가 고려혁명군 총사령 김규식의 부관(副官)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청산리 독립전쟁 이후 독립군과 함께 활동했음이 분명한 것 같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최해의 부인 김아지의 역할이다. 그녀는 ‘독립군의 아내로서 또는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3. 고려혁명군의 조직과 대종교

 

1) 고려혁명군을 조직하다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밀산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소련으로 건너가기로 하고 통합하기로 하였다.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 등 10여 개의 독립군이 통합하여 총병력 3,500명으로 이루어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총재는 최진동, 부총재는 김좌진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의 김좌진‧최진동‧안무‧홍범은 등은 재기를 다짐하며 소련 「이만」으로 이동하여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이때 김좌진은 우수리강을 건넜다가 만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독립군은 소련군에게 이용만 당하고 ‘자유시참변’에서 고려혁명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해야만 했다. 그 후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돌아왔는데,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던 김좌진은 북만주의 영안으로 돌아와 신민부를 조직하였고, 의군부를 이끌었던 김규식은 연길현으로 돌아와 만주에 남아 대일항전을 계속하고 있던 독립군과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최해는 의군부를 이끌었던 김규식과 함께 행동하였다. 1921년 12월 말 김규식‧고평‧최해 등은 약 300명의 독립군과 함께 소만국경을 넘어 연길현으로 돌아왔는데, 이들은 이범석 등과 함께 1923년 5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최해는 고려혁명군 총사령 김규식의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고려혁명군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總 司 領 金奎植

參 謀 長 高 平

副 官 崔 海

騎兵司令 李範奭

師 團 長 崔俊亨

憲兵隊將 許承完

警 務 官 鄭 道

軍 隊 四百名

 

고려혁명군은 조직을 정비하고 투쟁을 강화하였다. 우선 조직에 있어서는 국민개병제를 택하고 한인의 교육계몽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군대의 자치를 도모하고 교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병농일치의 둔전제를 실시하였고, 노령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이후 실제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으나 안으로는 군사훈련을 엄밀히 하고 밖으로는 선량한 농민으로 가장하여 후원하였다.

 

2) 대종교 활동에 전념하다

한편, 최해는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대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대종교의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은 치열한 독립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대종교 교단의 하부조직인 시교당(施敎堂)의 설치와 학교의 설립에 전력하였다.

김교헌은 1922~1923년 2년 동안 46개소의 시교당을 설치하였으며, 1922년 3월 5일 대종교 종회에서는 본래의 5도교구(五道敎區)외에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와 동이도본사(東二道本司)를 설치하였다. 그중 연길지역을 관할하는 동일도본사는 서일이 영도하였는데, 최해는 동일도본사에 종사하였다. 최해를 비롯하여 동일도본사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東一道本司(徐一 領導)

姜熹, 呂準, 鄭安立, 朴成泰, 朴賛翊, 鄭信, 申八均, 金東三, 李圭, 孫一民, 金東平, 羅愚, 黃尙奎, 徐相庸, 金佐鎭, 李章寧, 趙素昂, 金壽植, 崔海, 鄭勳, 桂和, 李範奭, 梁玄, 曹成煥, 白純, 李채(氵/采)雨, 金星, 羅仲昭, 玄天默, 玄天極, 高平, 鄭之澤, 吳赫, 朴斗熙, 洪熹, 李鴻來, 尹昌鉉, 金燦洗, 吳根泰, 嚴浩, 崔益煥, 權寧濬, 張裕淳.

 

이와 같이 최해는 고려혁명군의 일원으로 대종교를 시교(示敎)하며 독립운동을 재기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농사를 짓고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

 

 

4. 해방과 귀국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간도지방에서 한인의 독립운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독립군 부대와 함께 소련으로 갔던 최해는 1921년 북간도 연길현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의 총사령 김규식의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최해는 고려혁명군으로 활동하며 대종교의 포교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뚜렷한 활동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아들 최기룡의 회상기에 의하면, 길림성 유수현‧연길현 등지를 전전하며 농사를 짓고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개화기를 거치며 우리 민족이 그랬던 거처럼 최해 부부는 뼈골이 부러지도록 농사를 지어 두 아들을 중학교에 진학시켰다. 자식 교육시키다가 망한다는 동네 사람들의 비꼬는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권회복과 독립, 그리고 자식들의 매래를 선택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곳에도 해방의 환희가 넘쳤다. 그해 10월 20일 최해는 둘째 아들 기룡과 함께 행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부인과 큰아들을 먼 타국에 남겨둔 채, 그리고 독립군의 아내는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내며 만주 벌판 저 멀리 지평선으로 떠나는 부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최해는 서울에서 대동청년단 훈련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사망하였다. 그의 부인 김아지는 1968년 연길에서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동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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