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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5. 1월의 독립운동가 김진만
2015-01-25 13:08:30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230

 

□ 공훈개요

◦ 성 명 : 김진만(金鎭萬)

◦ 생몰연월일 : 1876. 8. 24 〜 1933. 11. 20

◦ 주요 공적

∙1876년 8월 대구 남산동 출생

∙1908년 9월 대구 달성친목회 참여

∙1915년 7월 대한광복회 참여

∙1916년 9월 대한광복회의 ‘대구권총사건’ 주도

∙1917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음

∙1924년 6월 가출옥한 후 1933년 11월 순국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77년)

 

□ 공훈설명

1. 김진만의 가계와 독립운동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 1876.8.24.〜1933.11.20, 본관 盆城)은 조선후기‧일제하 대구에서 태어나 활동했던 문인화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우 김진우(金鎭瑀, 1881〜 )와 아들 김영우(金永祐, 1895.4.15〜1926.4.16)도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선대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손자 김일식(金一植, 1912.10.3〜1953)도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다.

김진만은 대구 남산동에서 분성김씨(盆城金氏) 김재양(金在穰)과 전주이씨 춘옥(春玉) 사이의 장남, 아우 김진우는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진만은 달성서씨 서우순(徐佑淳)의 장녀 서복(徐福)과 결혼하여 영조(永祚)‧영우(永祐)‧영기(永祺)‧영정(永禎)의 4남과 필순(畢順)‧분조(粉祚)‧순분(順分)의 3녀를 두었으며, 김진우는 밀양손씨 손향이(孫香伊)와 결혼하여 영조(永祚)‧영수(永守) 등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김진만은 1908년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를 통해 계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6년 9월 아우 김진우와 함께 광복회의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한 ‘대구권총사건(大邱拳銃事件)’을 주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권총사건으로 김진만은 1917년 8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4년 가출옥되었으며, 아우 김진우도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4년 가출옥되었다.

김영우는 김진만과 서복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주이씨 이귀갑(李貴甲)과 결혼하여, 일식(一植)과 이식(二植) 등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약종상으로 일하면서, ‘대구권총사건’을 일으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아버지와 숙부의 옥살이를 뒷바라지하며 지내던 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영우는 1920년 음력 12월 무렵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부 참사(參事)로 활동하고 있던 황일청(黃一淸)의 권유에 따라 중국 봉천으로 건너갔다. 그는 1921년 1월 봉천에서 황일청과 함께 조선독립에 필요한 자금을 국내에서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1921년 3월 국내로 잠입한 김영우는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국내 일제의 주요 시설을 폭파하고 일본인 요인을 암살하기 위한 용도로 다이나마이트 7개, 뇌관 8개, 화선 11개 등을 전달받고 활동하였다.

김영우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1921년 6월 29일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고등경찰과 형사에게 체포되어, 1921년 7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총포 취체법 위반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4년 만기 출옥을 한 김영우는 1925년 봄에 사상단체 정오회(正午會)에 가입하여 대구지역 사회운동에 참여하였고, 1926년에는 대구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에 가입하여 위원으로 선임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감옥생활의 후유증과 늑막염으로 인해 1926년 7월 16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그의 동생인 김영기도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일식은 1911년 대구의 남산동에서 김영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형제와 아버지 형제의 항일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가 5살이 되던 1917년에 할아버지 형제가 ‘대구권총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9살이 되던 1921년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자금의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아버지마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는 등의 수난을 보면서 성장하였다.

1924년에 ‘대구권총사건’으로 대형무소에 수감되었던 할아버지 김진만이 가출옥하고, 아버지 역시 만기출옥하면서 가정에 다시 안정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14살 때인 1926년 아버지 김영우가 감옥생활의 후유증과 늑막염으로 인해 사망하였고, 숙부 김영기 또한 16살이 되던 1928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21살이 되던 1933년에는 할아버지 김진만까지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김일식은 항일투쟁의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김일식은 1927년 11월 대구고보 내 비밀결사로 조직된 구화회(丘火會)에 가입하여 동맹휴학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했으며, 1931년 6월에는 대구고보 재학 중 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에 참여하여 사회운동을 벌이는 등 1930년대 대구지역 사회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 후 김일식은 1945년 해방 정국의 신국가건설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대구지역 좌익의 정치 노선인 민족통일노선에 앞장섰다. 그는 1946년의 ‘10월 항쟁’에 참여하는 등 대구지역 좌익세력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동생 김이식도 해방 공간에서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이와 같이 김진만과 그 가족 3대는 1910년대에서 해방 후에 이르기까지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신국가건설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민족운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2. 김진만의 독립운동, 대구권총사건

김진만은 한말‧일제하에서 대구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이며 독립운동가였다. 뿐만 아니라 아우 김진우와 아들 김영우, 그리고 손자 김일식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진만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문인화가였다. 그는 1901년 그의 스승 서병오와 함께 중국의 위해(威海)‧소주(蘇洲)‧남경(南京) 등지를 여행하며 중국의 명필가인 오창석(吳昌石)‧제백석(齊白石) 등을 만났다. 이 중국 여행을 통해 김진만은 중국의 화단에 대한 식견을 키우는 한편, 중국의 문물과 서구에 대한 식견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김진만은 한말 대구지역에서 전개된 계몽운동에 앞장서 1908년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에 참여하였다. 달성친목회는 대구를 중심으로 각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들의 교육 및 실업의 장려를 표방하였던 계몽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실제로 달성친목회는 유망한 청년들을 단결시켜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위한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는데, 김진만은 대구출신의 청년지사 서상일(徐相日)‧윤창기(尹昌基)‧정운일(鄭雲馹)‧서창규(徐昌圭)‧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5년 정월 15일 서상일을 중심으로 한 달성친목회 회원들이 국권회복을 목표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고, 같은 해 7월 15일에는 박상진 등이 풍기의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하여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하고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우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이었던 박상진은 1915년 4월경 최준명(崔俊明)으로 하여금 서창규(徐昌圭)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토록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6월 경 최병규(崔丙圭)‧정운일(鄭雲馹)‧김재열(金在烈) 등이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바 있었다.

1915년 7월 15일 광복회가 결성된 뒤 먼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의연금 모집에 호응하지 않던 서우순을 협박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15년 11월 무렵 김진우‧정운일‧최병규 등이 대구의 부호 정재학(鄭在學)‧이장우(李章雨)‧서우순(徐祐淳) 등에게 각각 5만 원, 2만 원, 3만 원을 독립자금으로 내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구의 부호들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 김진만은 장인 서우순의 현금이 그의 첩의 집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916년 8월 박상진은 이시영‧정순영‧홍주일‧정운일‧김재열 등과 대구의 최병규(崔丙圭)‧최준명(崔俊明)‧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禹), 그리고 서우순의 아들인 서상준 등과 함께 서우순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로 잡은 1916년 9월 4일 김진만‧김진우 형제는 정운일‧최병규 등과 함께 서우순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에 놀란 서우순의 비명소리에 집사 우도길이 달려오자 정운일 일행은 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그들은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광복회의 소위 대구권총사건(大邱拳銃事件)이다.

대구권총사건으로 체포된 광복회 회원들은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김진우 12년, 김진만‧정운일‧최병규 10년, 권국필‧최준명 2년, 박상진‧김재열 6월, 홍주일 5월, 이시영은 4월의 징역을 각각 선고받았다. 김진만과 김진우 형제는 각기 10년과 12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는데, 김진만은 8년 3개월 18일을 복역하고 1924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1924년 6월 김진만은 나이 49세에 가출옥하여 1933년 11월 타개하였다. 그는 출옥 이후 10여 년 동안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옥고를 겪고 난 후 그는 세상을 은둔하며 그림에만 전념하였고, 자신에 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남기지 않았다. 또 그는 집안이 부유했으나 가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진만은 일제하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였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동생 김진우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여 8년여의 옥고를 치렀고, 세 아들 영조‧영우‧영기 등도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차남 영우는 1926년 7월 1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등 세 아들을 먼저 보내야만 했다.

정부에서는 김진만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아우 김진우에게는 같은 해인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아들인 김영우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김진만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국권회복단Ⅰ), 국사편찬위원회, 1993.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判決文」(1917. 6. 18, 大邱覆審法院).

                      「判決文」(1932.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권대웅,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 연구」, 『민족문화논총』9,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8.

권대웅, 「한말 달성친목회 연구」, 『韓國近現代史硏究』오세창교수화갑기념, 1995.

권원순, 「긍석 김진만의 생애와 예술」, 『긍석 김진만 서화집』, 1980.

이인숙, 「근대기 대구의 문인화가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 1876〜1933) 기명절지화 연구」,

           『민족문화논총』52,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2.

김일수, 「김일식(金一植)일가의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운동」, 『역사연구』26, 역사학연구소, 2014.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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