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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12월의 독립운동가 이강년
2014-11-21 17:12:15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1998

 

□ 공훈개요
◦ 성      명 :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 생몰연월일 : 1858. 12. 30 ~ 1908. 10. 13
◦ 주요  공적
   ∙1896.2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킴
   ∙1896.3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에 추대
   ∙1907.8 광무황제의 밀지로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 
   ∙1907.8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 
   ∙1907.11 13개도 연합의병 호서창의대장에 임명
   ∙1908.10 제천 청풍 작성(鵲城)전투에서 피체되어 순국               
◦ 훈      격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 공훈설명
◇ 이강년의 성장
◦ 이강년(李康秊)의 본은 전주이며 1858(철종 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加恩面) 도태리(道台里)에서 아버지 이기태(李起台)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낙인(樂仁)이며 호는 운강(雲崗)이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기골이 장대해져 키가 8척이 넘었고 눈빛에 위엄이 있었다. 
◦ 이강년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뒤 물러나 향리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가담하였다. 이때 함께 동학군으로 활동했던 많은 농민들이 곧 이어 일어나는 의병투쟁의 자원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갑오변란’과 이듬해 일어난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특히, ‘단발령’은 전국의 재야 유생들을 분개시켜 투쟁이 확산되는 직접적인 불씨가 되었다. 
◦ 이강년은 제천에서 유인석 의진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23일(음 1.11) 자신의 가산을 털어 60여 명의 군사들을 모집하여 가은면 토태 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의병이 일어나자 안동부를 빠져나와 도주하던 친일 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2명을 사로잡아 2월 25일(음 1.13) 농암(籠巖) 장터에서 처형하였다.

 

◇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다
◦ 당시 유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진들은 전투력에 취약하였는데, 유인석 의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무장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이강년 부대의 합진은 유인석 의진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에 취임한 이강년은 1896년 3월 17일(음 2.1) 전군장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군사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9초(哨)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尹基榮)과 함께 문경 평천(枰天)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의 공격으로 유인석 의진이 패하자 유인석은 일단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넘어갔다. 이강년도 스승 유인석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하였다가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丹陽) 금채동(金采洞)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 이강년은 금채동에 은신하면서 의병 전술에 관한 그간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작성하였다. 이것은 의병의 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을 그림으로 설명하여 기록한 것인데, 훗날 전투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 광무황제로부터 도체찰사를 제수받다
◦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불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1907년 ‘군대해산’ 이후로는 해산당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의 조직력과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 이강년도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한 뒤, 강원도 일원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8월에는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일어난 민긍호 부대를 비롯한 여러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제천 전투를 치렀다. 제천 전투에서는 적군 500여 명을 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는 이강년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하고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印章)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는 비장한 ‘밀조’를 내렸다.

 

◇ 도창의대장에 추대되다
◦ 제천 전투에서 승리한 뒤 각지에서 모여 든 40여 의병부대가 제천에서 이강년을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하였다. 그는 제천 백묘에서 진을 치고, 여러 부대와 연합하여 충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충주는 군사상 요충지로서 뿐 아니라 의병투쟁의 거점 마련이라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여러 부대가 시기를 놓침으로써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이강년은 군율을 정비하고 풍기(豊基) 도촌(道村)에서 친일 앞잡이 김기찬(金基燦)과 일진 회원 김상호(金商虎) 등을 총살하는 등 반민족 행위자를 응징하였다. 원주에서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진용도 정비하였다. 8월 3일, 그는 갈평(葛坪)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큰 전과를 거두었다.  
◦ 8월 중순부터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9월에 들어서 주변 의진의 합세로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해서 9월 원주 추치 전투와 죽령 전투 및 10월 단양 고리평(故里平) 전투 등에서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서 10월 풍기 백자동(栢子洞)  전투에서 분전하였으나 11월 풍기 복상동(復上洞)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

 

◇ 13도 연합의병의 호서지역 대장으로 선임되다
◦ 지역 분산적인 의병투쟁의 한계를 자각한 이인영(李麟榮)과 허위(許蔿) 등은 전국 의병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서울로 진공함으로써,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고 일제를 한국에서 몰아낼 계획을 하였다. 이에 1907년 11월, 각 의진에 통문을 보내 전국 의진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알리고 13도창의대진소를 창설하였다. 이때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에 선임되었다. 
◦ 이강년은 서울진공작전을 위한 양주 집결을 위해 북상을 서둘렀다. 하지만 경기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폭설과 추위로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과 탄약의 부족으로 진군이 어려웠다. 결국 이강년은 부대를 정비하여 이후의 항전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 1908년에 들어 이강년은 휘하 장병들을 독려하여, 용소동(龍沼洞) 전투와 대청리(待淸里) 갈기동(葛基洞) 전투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 가장 빛나는 전투는 3월 12일, 강원도 인제(麟蹄) 백담사(百潭寺) 전투와 안동 서벽(西璧) 전투, 4월 6일 봉화 내성(乃城) 전투, 4월 8일 안동 재산(才山)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 작성전투에서 피체되어 순국하다
◦ 이강년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막강한 의병부대였지만 안타깝게도 1908년 6월 4일, 청풍 작성(鵲城,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와 화기의 열세로 퇴로가 막혀 여러 장령들이 전사하여 고전하던 차에 자신도 발목에 적탄을 맞고 적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 이강년은 충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이송되었다. 재판정에서도 "선비에게는 죽음을 줄지언정 욕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나는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다시 무엇을 한하랴"하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 해도 넋마져 사라지랴.” 라는 옥중시를 남겼다. 
◦ 이강년은 평리원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1908년 10월 13일, 51세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장령에 의해 『운강선생창의일록』이 편찬되었다.

 

□ 참고문헌
• 박정수,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의병항쟁재판기록),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조선폭도토벌지』), 1983.
• 정제우, 『운강 이강년 의병장』,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구완회, 『한말의 제천의병』, 제천시, 1997.
• 김희곤 외 5인,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문경문화원, 2009.
• 권대웅·권영배, 『경북독립운동사』Ⅰ, 경상북도, 2012.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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