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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10월의 독립운동가 이현섭
2014-11-21 17:08:46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1723

 

□ 공훈개요
o 성      명 : 이현섭(李鉉燮)
o 생몰연월일 : 1844. 10. 26~1910. 11. 26
o 주요  공적
   ∙1885년 성균생원으로 관직 진출
   ∙1886년 외척의 모함으로 평안도 철산 유배
   ∙1894년 갑오왜란에 항거하여 안동군 예안으로 은거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감
   ∙1910년 음독 순절
 ㅇ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 공훈설명
ㅇ 개요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중구리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에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금치 못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안동 예안면(禮安面) 양평리(良平里)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끊고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저(遺著)로 우헌실기(愚軒實記) 2권이 전한다.


1. 경북 예안의 순절 인사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가 망하는 것도 분통한 일이며 외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며 깨끗이 자정(自靜)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중에서 자결 순국은 일제에 항거하는 여러 방략 가운데 가장 강경한 방법이었으며, 경술국치 전후에 수십 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자결 순국의 길을 택하였다.
1910년 9월 1일 충북 금산군수 홍범식과 성주군수는 강제 병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하였다. 9월 6일 감찰 권용하, 9월 8일 전판돈녕부사 김석진, 9월 10일 전남 광양의 황현 등이 순국 자결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자결 순국자가 연이어 나타났다.
경술국치 이후 가장 자결 순국 인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지역은 경북을 필두로 전북·전남 등지였다. 나라가 망하자 이를 개탄하고 일제통치를 거부하였다. 특히 경북 안동의 예안에서 순절자가 많았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이 경술국치를 당한 10여일 후 단식에 들어가 24일 만인 1910년 10월 10일 순국하고, 이 소식을 들은 향산의 족질 이중언(李中彦) 선생이 27일 동안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당시 예안에서 은거하던 이현섭 선생은 향산 이만도 선생이 순절한 이후 음독 순국하였다.


2. 생애와 활동
이현섭 선생의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이다. 선생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니 송오(松塢) 이진(李軫)의 11세손이다. 선생은 1844년(헌종 10)에 군위군(軍威郡) 죽리(竹里)에서 태어났다. 1885년(고종 22)에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되어 활동을 하였으나, 다음해인 1886년(고종 23) 봄에 평안도 철산(鐵山)으로 유배되었다. 선생이 유배를 당한 이유는 당시 외척들의 횡포가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외척들이 궁중에서 정권을 휘둘렀는데 정재학파의 류기호(柳基鎬)를 비롯하여 이만응(李晩鷹)·이중린(李中麟)·조영기(趙永基)·이수학(李壽學)·이명연(李明淵) 등 한 시대를 주름잡던 영남의 명유들이 중상모략을 당하여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때 이현섭 선생과 그의 형인 진사(進士) 이현무(鉉懋)도 견책을 받은 것이다.
그 후 1894년(고종 31) 3월 전라도에서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였다. 조선정부에서는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해 6월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해 일본도 군대를 파병하였다.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본은 청나라와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와 고종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다. 일본은 7월 23일 아산만 입구의 풍도 해상에 있던 청국 군함을 기습하여 격침시킨 것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그날 새벽 일본 혼성여단 2개 대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불법으로 침략하는 ‘갑오왜란(甲午倭亂)’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주한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은 경복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현섭 선생은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가족을 이끌고 경북 안동 예안(禮安) 청량산(淸涼山) 아래 양평마을(良平)로 이주하며 시국을 걱정하며 지냈다. 선생이 은거한 청량산은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곳으로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매우 조용한 곳이다. 선생이 은거한 예안에는 이름난 명유들이 많았던 곳이다. 퇴계 11대손인 향산 이만도 선생이 관직을 정리하고 고향인 예안에 있으면서 1893년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가더니 마침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해 보겠다고,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그렇지만 이미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3. 단식
이현섭 선생은 예안에 있으면서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바라만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경술년(1910)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병탄을 당하였다는 국망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분개하였으며, 일본인들의 종으로 살 수 없다는 의리를 내세워 머리 빗고 세수하는 일을 폐하고 문을 닫아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었다. 점심을 내오지 못하게 하였고, 아침과 저녁만을 올리게 하였으나 그마저도 식사량을 줄였다.
그런데 선생이 음식을 끊고 줄인 이유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도 그 연유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1910년 9월 15일 이현섭 선생이 마침내 탄식하며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비록 못난 사람이나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사람 대하기가 부끄럽고 하늘을 우러러 죄를 진 것 같았다. 원수의 백성은 될 수 없어 일찍이 마음으로 죽기를 맹세했었다. 그러나 구차하게 오늘날까지 목숨을 연명한 까닭은 멀리 외지로 이사 온 지 10년에 의지할 바는 너희들 몇 뿐인데, 봉영(鳳永)이와 근후(根厚)가 병들어 누운 지 여러 달 동안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 어찌 차마 내 뜻을 펴겠다고 함께 죽겠는가. 좀 더 기다리다 보면 죽을 만한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선생의 자식과 조카들은 모두 울면서 자정을 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내가 임금을 섬긴 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죽을 필요는 없겠으나 내 몸을 깨끗이 하여 치욕을 당하면서 구차히 살고 싶지 않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음력 10월 1일이 되자 선생은 “봉영이와 근후가 좀 나았으니 내 뜻을 실행할 수 있겠다. 지금부터 끼니를 올리지 말라.”고 하더니, 얼마 후 “할아버지 제사가 5일이다. 이왕에 연명하였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뜻을 펴야겠다.”라고 하고 끼니를 올리라고 하였다.
10월 5일이 되자 마침내 식사를 끊었고, 9일에 본부(本府)의 전패(殿牌)를 없앴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패란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패로서, 공무(公務)로 간 관리나 그 고을 원이 절을 하고 예(禮)를 표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전패를 없앴다는 것은 사실상 나라가 망하여 임금이 없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전패를 없앴다는 변보를 들은 선생은 밖에 자리를 펴도록 명하더니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어 남쪽을 향해 통곡하며 4번 절하였다. 그리고 장조카 이인영(李麟永)을 불러 “내가 비록 장손은 아니나 이토록 극도의 변을 당하고서 전처럼 사묘(私廟)를 받드는 것이 마음으로 매우 미안하다. 처음 합방 소식을 들었을 때 곧바로 위패를 묻고 싶었으나 우선 미룬 것은 실로 신중을 기한 것이다. 변이 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곧 결단하여 시행하고 싶구나.”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장조카 이인영이 울면서 물러나 마침내 위패를 땅에 묻었다. 제일(祭日)이 되자 이현섭 선생이 친히 고유문을 읽으면서 잠시 통곡하였다.
선생이 단식을 시작한 얼마 후 일본인 아타 나카이치(阿多中一)이라는 자가 순사들을 데리고 와서 “이상사(李上舍) 대인공(大人公)이 식사를 끊은 지 여러 날이라 하니 과연 그런가?”라고 힐책하듯이 말을 하였다. 이에 이봉영이 “그렇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아타 나카이치는 “대인 이공이 호적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자, 이봉영이 “일본이 만든 호적이라 의리상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일제의 통감부에서는 1909년 3월 민적법(民籍法)을 제정·공포하고 그해 4월 1일부터 이 법을 시행하였다. 이 민적법이 시행됨에 따라 그해 7월부터 경무국에서는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1910년 12월 조사가 종료되었다. 민적법의 시행과 이를 위한 호구조사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본인 아타 나카이치는 차고 있던 칼을 풀고 모자를 벗더니 선생을 뵙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현섭 선생은 성난 소리로 “우리나라가 네 나라에 무슨 원수 진 일이 있기에 임진년(1592)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정릉과 선릉 두 능을 욕보이더니, 갑오년(1894)에는 국모를 시해하고, 이어서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깎았으며, 우리 강토를 빼앗으려 임금을 별궁에 유폐하고 종사를 폐하여 합방하더니 이제 또 종묘의 위패를 남쪽으로 옮기고 일본 국기를 사방에 세우기까지 하는가. 내가 홀로 국세(國勢)를 만회할 수 없다면 어찌 차마 몸을 굽혀 굴욕을 당하면서 일본과 함께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크게 꾸짖어 물러가게 하였다. 이에 아타 나카이치는 “공은 범같은 인물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물러갔다.
아타 나카이치라는 자는 안동지방에서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강제적인 병탄조약에 항거하여 순국자결하는 지사들을 회유하는 일을 하였다. 이현섭 선생이 단식을 하기 전인 10월 10일 순절한 향산 이만도 선생이 단식을 할 때에도, 이 자는 칼을 풀어 놓고 모자를 벗은 뒤 엎드려 음식 들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이만도 선생은 “나라가 이미 망한데다가 몸 또한 병들어 이제 죽음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먹고 안 먹는 것이 외국인에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되물어 내쳤다고 한다.


4. 음독 순절
일본인 아타 나카이치라는 자가 다녀간 후인 23일 밤, 이현섭 선생은 갑오년(1894) 성균관에서의 일을 추억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憶昔無言甲午夏  말없이 지난 갑오년 여름 생각하니
  乾淸宮外簇蠻騎  건청궁 밖에는 왜놈 기마병들 늘어서 있었지.
  九天號痛心無快  하늘에 고통 호소하나 마음 상쾌하지 않으니
  十載腐腸孰有知  애간장 끊어지던 지난 십년 그 누가 알리요.

위 시에는 선생이 갑오왜란 이후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선생은 갑오왜란으로 궁궐이 침범당하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예안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단식을 하던 이현섭 선생은 이효영(李孝永)을 불러 “내 생각해 보니, 서두르지 않으면 나 때문에 원근(遠近)의 지인들이 고초를 당할 듯하여 실로 불안하다. 그렇게 되면 나도 괴롭고 너희들도 괴로울 것이다. 지난 을사조약(1905)으로 서울에 갔을 때 내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 물건을 하나 준비해 두었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이 말은 을사늑약 때부터 선생은 자정 순국을 결심하고, 음독할 약을 구입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날 밤 인적이 드물 때 약을 마셨다. 그러나 서울에서 약을 사온 지 오래 되어 그 약효가 많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독약을 마신 이후로 기력과 정신이 크게 쇠약해져만 갔다.
이제 약 기운이 돌면서 혼자 일어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가족들에게 부축해 일으키도록 명하더니 건을 바로 쓰고 의복을 갖춰 입었다. 문을 열고 서쪽을 향하여 한동안 흐느껴 울다가 혼절하여 쓰러졌다. 가족들이 큰소리로 울자 서서히 다시 깨어나며 손을 저어 울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선생은 식사를 끊었을 때의 유언으로 일기를 남겼는데, 가족들에게 혼백(魂帛)을 하지 않았고 다만 허위(虛位)만 설치하라고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김희곤 지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안동 선비 열 사람』, 지식산업사, 2010.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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