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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9월의 독립운동가 윤자영
2014-11-21 17:08:07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204

 

□ 공훈개요
o 성      명 : 윤자영(尹滋瑛)
o 생몰연월일 : 1894. 9. 13~1938. 10. 14
o 주요  공적
   ∙1919년 3·1운동 때 학생들의 시위 주도, 징역 1년형 받음
   ∙1920년 조선청년연합회 서무부 상무위원
   ∙1922년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 통합회의 의장
   ∙1923년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
   ∙1925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선전부 책임
   ∙1929년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조직부 책임
   ∙1932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ㅇ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2004년)

□ 공훈설명

ㅇ 개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는 이념과 정치적 지형으로 말미암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사회주의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소련에서 억울하게 희생을 당한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다. 윤자영 선생도 그 가운데 한 분이었다. 3·1운동 당시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옥 이후에도 청년운동과 각종 사회운동에 맹활약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하였으며, 그 후 임시정부에 들어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28년 이른바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되자 조선공산당원들은 당재건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윤자영 선생도 만주 길림성에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30년 국내에 파견되어 함경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활동이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서 활동을 하였다.
선생은 ‘12월 테제’ 이후 당재건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모스크바 유학을 위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학업을 전념하던 중 선생은 스탈린의 대탄압정책 때문에 1938년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다.


1. 3·1운동 참가
윤자영 선생의 본관은 파평이며, 1894년 9월 13일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金谷洞) 74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선생의 부친 윤만박(尹晩鎛)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선생은 근대적 고등학문을 수학하기 위해 1913년 경 서울로 올라와 경성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곧 바로 경성전수학교로 옮겼다.
선생의 나이 만 25세 때인 1919년 2월 경성전수학교 연락총책으로 3·1운동의 중앙지도부와 연락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3·1운동의 계획 단계에서 각 학교의 학생대표들이 선정되었는데, 선생은 김성득(金性得)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3·1운동 당시 학생들은 역할을 나누어 독자적인 시위를 감행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이용설·한위건·한창환 등과 함께 학생들의 시위로 대표들이 구속될 경우 2단계 투쟁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윤자영 선생은 3·1운동 당시 학생들이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핵심부에서 민족대표들의 연합전선 형성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3월 1일 거사 당일 김성득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종로 부근에서 시위와 독립만세 제창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서울에서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선생은 일제경찰에 피체되어, 그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 청년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참여
거족적인 3·1운동이 발발하여 만세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으나, 선생은 일제에 피체되어 1920년 7월까지 1년 4개월 가량 감옥에 있어야만 했다. 옥고를 치룬 후 선생은 곧 바로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7월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가 개최될 때, 오상근·장덕수 등 22명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장도빈·이영 등 8명과 함께 지방부 위원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2일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리자 서무부 상무위원을 맡았고, 다음해 4월에 열린 제2차 정기회의에서는 교무부 상무위원이 되었다.
선생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간부로서 각종 강연회·기고 등을 통해 청년운동 확산에 노력하는 한편, 청년운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구심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1921년 1월 윤자영 선생은 이득년·김한·홍증식·김사국·이영·장덕수 등과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서울청년회 초기 주도인물로는 선생을 비롯하여 김사국(金思國)·이영(李英)·이득년(李得年)·김한(金翰)·홍증식(洪增植)·장덕수(張德秀)·김명식(金明植)·오상근(吳祥根)·한신교(韓愼敎) 등을 들 수 있다. 서울청년회에서 선생은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기고문을 발표하였고,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서울청년회·노동공제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윤자영 선생은 사회주의사상에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 같다.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직후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사회혁명당’에 가입하였다. ‘사회혁명당’은 원래 ‘신아동맹단’이라는 반일혁명단체였으나 1920년 6월 ‘사회혁명당’으로 개명하고,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윤자영 선생은 1920년 초반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로 망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국외로 망명하였던 것 같다. 1922년 10월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을 통합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분열된 두 개의 고려공산당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회의였다. 윤자영 선생은 상해파 고려공산당 소속의 마산지역 대표 자격으로 베르흐네우진스크 통합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이 대회의 의장으로서 의사 진행을 담당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 대회의 대표로 코민테른에 파견되어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측의 반발로 베르흐네우진스크 통합대회의 결정사항은 취소되고 말았으며, 상해파와 이르크츠크파 두 파가 해체되고 극동부 산하에 꼬르뷰로가 설치되었다.


3. 국민대표회의와 개조론 주장
1920년대 전반기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편과 독립운동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꼬르뷰로에서도 상해에서 열리는 국민대표회의에 상해파의 대표로 윤자영과 이르크츠크파의 대표로 장건상을 파견하였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 참석자 가운데 가장 빠른 1923년 2월 12일 경북지방 대표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 회의에서 선생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회의 벽두부터 ‘시국결의안’을 제안하고 통과시키는데 주역을 맡았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데에 찬성하고, 현실에 맞게 틀을 고치자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임시정부 개조론의 기본방향은 “피압박 민족들의 혁명운동과 우리 혁명가들의 단일전선 조직과 현 시기 운동의 성격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유혈 수단에 따른 조직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개조하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1923년 3월 5일부터 시국문제의 토론이 시작되면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여야 된다는 창조파의 주장과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하여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난항을 거듭한 것이다. 정부 개조안은 3월 8일에 윤자영·신이진 등 19인이 연서로 정부개조 3개항의 제의안을 제출하면서 정식으로 공론화되었다. 3개항의 제의안은 다음과 같다. ①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들의 운동으로써 세계의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과 통일전선이 되도록 결정함. ②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들의 운동으로써 혈전에 중점을 두고 조직적으로 추진해 가기로 결정함. ③본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헌법·제도·정책 및 기타 일체를 실제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선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임시의정원내의 반발로 개조파와 임시정부와의 타협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대표자들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 회의에서 의장 김동삼, 비서장 배천택, 이진산과 김형식은 소속 단체로부터 소환통고를 받고 사임을 자청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 대한국민회 대표 윤해가 의장에 선출되었고 천도교 대표 신숙과 수청남부소대표 오창환이 부의장에 당선되어 대표회의 수뇌부가 창조파에 의해 점유되었다. 이에 개조파는 모두 퇴장하여 무기정회가 선언되었다. 결국 1923년 5월 15일 회의를 끝으로 국민대표회의는 사실상 결렬되었고, 개조론으로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하였던 윤자영 선생도 안팎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뒤 윤자영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하였다. 1923년 7월 2일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이 되어 ‘임시헌법 개정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안동출신의 의열단원인 김지섭(金祉燮)의사를 일본으로 밀항시켜 일왕의 궁성을 폭파하는 의열투쟁을 뒤에서 도와주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들이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일제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윤자영 선생은 1924년 4월 5일 프랑스조계 팔선교에 자리잡은 삼일당에서 청년동맹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직접 사회를 맡았다. 청년동맹회에는 임시정부에 속했던 청년들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전선적인 성격의 단체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 청년동맹회에선 선생은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덕진·김상덕·장덕진·최충신 등과 함께 상무위원이 되었다. 선생은 청년동맹회를 중심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1925년 8월부터 1926년 2월까지 상해대학에 청강하는 학구열을 보이기도 하였다.


4.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및 재건운동 참가
청년동맹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윤자영 선생은 1925년 11월 국내에서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국 상해로 망명한 김찬(金燦)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상해에 있던 선생은 김찬을 만나 협의한 결과 그의 주도하에 만주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1926년 4월 국외로 망명한 최원택·조봉암·김동명 등 화요파에게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설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에 따라 선생과 김하구 등 상해파와 최원택·조봉암·김동명 등 화요파가 함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만주총국 책임비서에는 조봉암, 조직부 책임에는 최원택, 선전부 책임에는 윤자영이 맡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는 김하구·김철훈·김용락 등이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화요파와 국외에서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상해파가 연대하여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곧 바로 신병을 이유로 선전부장을 사임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화요파가 주도하면서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만주총국에서 물러난 선생은 일시는 불명하지만 1927년 3월 모스크바로 갔다가, 그해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1927년 7월 만주 용정에서 상해파 공산주의자그룹인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1925년 4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여러 차례 대대적인 검거를 당하면서 괴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코민테른에서는 조선공산당이 인텔리 중심을 당이라고 하면서, 노동자·농민에 기초를 둔 전위당을 건설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2월 테제’이다. ‘12월 테제’로 말미암아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이 취소당하였고, 앞으로는 노동자·농민에 뿌리를 둔 전위당을 건설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이후 조선공산당의 각 파벌들은 당재건운동에 착수하게 되었다.
윤자영 선생이 속한 서울·상해파에도 ‘12월 테제’ 이후 이동휘·김규열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고, 선생을 비롯한 김철수·오산세·안상훈 등이 국내와 연결이 용이한 길림성 방면에 근거지를 두고 당재건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윤자영 선생은 1929년 2월 하순 동지들과 길림성 돈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상해파 공산당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책임비서에는 김철수, 조직부에는 윤자영, 선전부에는 김영만, 연락부에는 김규열, 경리부에는 최동욱, 정치부에는 김영식, 공청부에는 오산세가 맡았다.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서는 기관지로 『볼셰비키』를 발행하여 자신들의 사업을 선전하였다.  

한편, 상해파 당재건운동에서는 국내의 조선공산당 및 공산청년회를 조직하기 위해 안상훈·송무영·홍달수·김철수 등을 국내에 파견하였으나 곧 검거를 당하고 말았다. 이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서는 당재건을 위해 1930년 10월 윤자영 선생을 직접 국내에 잠입시켰다. 서울·상해파에서는 다른 공산주의 그룹과 달리 국내에 조직원들을 파견하여 당재건을 꾀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당시 코민테른의 ‘1국 1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원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서울·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은 이 같은 방침에 따르지 않기 위해, 1930년 전반기에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울·상해파에 속한 조선공산당원들은 서둘러 국내에 진입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윤자영 선생은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미리 파견한 김일수 밑에 들어가 조직부 책임을 맡았다. 이들 당재건 그룹에서는 함경도 함흥을 비롯한 공장지대에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당재건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국내에 파견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의 중앙책임은 김일수였지만, 실질적으로 조직의 최고 지도자는 윤자영 선생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각 지역의 책임자들이 선생에게 상황을 보고하는가 하면, 선생이 공청 책임자의 지역을 정해 주는 등 실질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윤자영 선생이 함경도지역에서 활동할 당시 파벌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코민테른으로부터 당재건 조직을 해체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1931년 1월 중순에 열린 제2차 간부회의에서, 선생은 “코민테른의 지령은 반드시 해체하라는 고압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국내에서 열성당원을 규합하여 당기관을 이룩했을 대에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겠다는 매우 애매한 태도이다”라고 하면서 당재건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에서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이 파벌적인 성격이 있음을 지적하였기 때문에,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용납되지 않아 윤자영 선생은 1931년 5월 만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해 12월 일제에 의해 상당 수의 동지들이 피검되고 말았다.


5. 모스크바 유학과 최후
만주로 탈출한 윤자영 선생은 바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주특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하다가, 다음해인 1932년 9월 26일 중국공산당에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레닌대학 유학을 신청하였다. 국제레닌대학은 각국 공산당 중앙간부들의 교육·훈련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국내에선 김단야를 비롯한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입학하여 교육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선생이 신청한 국제레닌대학 입학 청원은 기각되었고, 그 대신에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국내외에서의 활동으로 지킨 몸을 추스르며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자영 선생은 모스크바 유학 중에 스탈린의 대탄압정책에 희생을 당하고 말았다. 스탈린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소련 전 지역에 집단체제를 도입하였으며, 1934년부터 1939년까지 권력장악을 위한 대규모 정치적 억압과 처벌운동을 단행하였다. 스탈린이 이 같은 대탄압을 벌린 이유는 정치적으로 억압과 감시를 통한 소련공산당의 숙청에 있었다. 대탄압의 대상은 스탈린의 통치에 적대적이거나 반혁명 또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는 인사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 스탈린의 대탄압으로 말미암아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강제이주를 당해야만 했다. 그중에는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국가들의 첩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는 소수 민족까지 포함되었던 것이다. 물론 수천명에 달하는 한국인 지식인들도 소리 소문없이 끌려가 총살형을 당하였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이던 윤자영 선생도 예외가 될 수가 없었다. 반당분자로 낙인찍힌 지노비에프의 동조자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는 1938년 10월 2일 노보르시비르스크주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최고형인 총살형이 선고되었고, 10월 14일 처형당하고 말았다.
1954년 스탈린이 죽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한인들의 혁명운동과 한인들의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독립운동에 관해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윤자영 선생은 1958년 12월 19일 복권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김희곤 외, 『청송의 독립운동사』, 청송군, 2004.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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