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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8월의 독립운동가 박상진
2014-11-21 17:07:44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562

 

□ 공훈개요
o 성      명 : 박상진(朴尙鎭)
o 생몰연월일 : 1884. 12. 7~1921. 8. 13
o 주요  공적
   ∙1899년 왕산 허위 문하에 입문
   ∙1912년 대구에서 상덕태상회 설립
   ∙1915년 광복회 총사령 취임
   ∙1920년 사형 선고받음
   ∙1921년 순국
o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 공훈설명

             母葬未成       어머님 장례 마치지 못한 채
             君讐未服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國土未復       빼앗긴 강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死何面目       이내 몸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 걸어갈까

             難復生此世上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에
             幸得爲男子身   다행히 대장부로 태어났건만
             無一事成功去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에 가려하니
             靑山嘲綠水嚬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구나
(박상진이 순국 당일 남긴 유시)

1. 울산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나다
선생은 1884년 12월 7일 울산 송정동(松亭洞)에서 시규(時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선생의 생부는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홍문관 시독, 장례원 장례를 지냈고,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정3품으로서 규장각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출계(出系)하여 모신 백부(伯父) 시룡(時龍)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박상진은 네 살 때인 1887년 경주 녹동으로 이사하여 양부모의 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유난히 정이 많았고, 효행이 지극하여 주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5세가 되던 1898년 만석꾼 집안인 경주 최부잣집 규수 영백(永伯)과 혼인하였다. 이는 후일 그의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재산 송사를 빚기도 하였다.


2. 왕산 허위를 스승으로 만나다
선생은 1898년을 전후하여 왕산 허위를 스승으로 맞이하여 수학하였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허위와 그 주변 인물들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의 영역을 넓히고 인적 기반의 외연을 넓힌 것은 큰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허위는 1896년 김산의진에 참여하였고, 1907년 11월에는 이인영과 13도창의군을 조직하여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교전 결과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의병항전을 계속하였으나, 1908년 6월 11일 피체되어, 9월 27일(양력 10월 21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순국 시 허위의 나이는 55세였다.
그는 스승의 순국 소식을 듣고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가 스승의 시신을 인수하여 극진히 장례를 모셨다. 1902년 상경하여 허위 문하에서 수학하던 박상진은 21세이던 1904년 고향으로 내려와 노비를 해방시키고 적서의 차별을 없애는 혁신을 단행하였다. 이는 이미 혁명가로서 박상진의 사상이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나, 한편으로는 그의 스승 허위의 영향과의 관련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3. 신학문을 수학하고 견문을 넓히다
박상진은 1902년 스승 허위가 있는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가 1905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 법과에 입학한 것은 스승의 권고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양정의숙 재학은 신학문을 수용하고 미래의 동지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는 1908년 양정의숙을 1회로 졸업하였다.
그가 양정의숙에 재학 중, 중국인 반종례(潘宗禮)를 따라 중국 천진(天津)을 다녀왔다.
반종례와의 교류는 박상진이 민족운동을 펼치는 데 커다란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생애에서 최초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 목격한 열강국의 동양 침략상은 그가 민족운동에 적극 투신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양정의숙에 재학하는 동안 그는 신학문과 신사상을 수용하는 한편, 신돌석·김좌진과 의형제 결의를 맺고 헐버트와 교류를 하며 견문과 인적기반을 넓혀 나갔다. 이는 훗날 그가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소중한 인적 자산이 되었다.


4. 판사직을 내던지고 독립운동의 길로
선생은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자 단연코 사직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일제의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고 하는 선생의 강렬한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
1911년 망국의 설움을 안고 고국을 떠난 선생은 중국 만주를 여행하면서 허위의 형인 허겸과 손일민(孫一民)·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 독립운동자들을 만나 투쟁 방략을 논의하고 모색하였다. 이때 중국은 민주혁명으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이를 직접 목격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때문에 선생은 이후 중국혁명을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신해혁명기 선생의 중국 여행은 양정의숙에서 근대적 신학문을 배운 경험과 서로 상승 작용하면서 잔존하고 있던 군주제를 옹호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적 사고를 완전히 떨쳐버린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개인적 경험이야말로 선생이 혁명단체로서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할 수 있었던 주체적 조건이 되었다.


5. 국내외에 독립운동 거점 마련
1912년 귀국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해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라고 하는 곡물상회를 개설하였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 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15년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계몽운동 및 독립운동 단체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정운일(鄭雲馹) 등 영남지방 계몽운동 계열 인사들과 의열 계열 인사들이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는 계몽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정보 연락, 그리고 군자금 조달 등의 독립군 지원활동을 벌여갔다.
한편으로 선생과 정운일·김재열(金在烈) 등 이 단체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면 지역단위의 독립운동만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보다 강력한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을 구상하여 갔다. 당시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은 그간 토지에 관계된 농민적 제(諸)권리를 부정하면서, 지주 위주로 시행됨에 따라 지주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여 주었다. 때문에 지주층은 식민통치 체제가 자신들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데 나쁘지만은 않다고 하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구래(舊來)의 봉건 지주층은 일제 식민통치 체제에 안주(安住)하면서, 그 사회 경제적 지주(支柱)로서 기능하는 식민지 지주로 재편되고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독립운동 단체의 군자금 수합 활동에도 영향을 끼쳐 순리로서 군자금을 모금할 수 없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6.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 광복회 조직
선생은 반민족적 지주들을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무력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수합하고, 그것으로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후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민족독립을 달성한다는 계획 아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1915년 7월 15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구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제휴한 풍기광복단은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한훈(韓焄) 등이 주도하여 1913년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 그 구성원은 의병출신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단체 또한 만주 독립군과 연락하며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조직원들의 성향과 투쟁방략은 그를 비롯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 계열 인사들과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에 광복회의 탄생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광복회 결성 당시 조직원들은 "오인(吾人)은 대한독립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이란 결의문을 채택하고, 7개의 실천 강령을 마련하였다.
실천 강령에 의하면 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하여 정보·연락망을 구성한 뒤, 적시에 무력으로 민족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광복회는 일제 타도의 계획을 추진하는 행동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 항목을 시달하였다.
그는 창립 당시 광복회 총사령에 추대되었고,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본명 이진룡)가 선임되었다. 이진룡의 순국 이후에는 김좌진(金佐鎭)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였다. 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16년에는 예산(禮山)을 중심으로 하는 충남 일대, 해주(海州)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寶城)을 비롯한 전남 일대, 그리고 서울·삼척·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국외에도 조직망을 설치하여 주진수(朱鎭洙)·손일민·우재룡 등은 북만주 길림지방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였고, 남만주 서간도 지방의 부민단(扶民團) 또는 신흥학교 등과도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광복회는 선생이 설립한 대구의 상덕태상회를 본거지로 하여 영주·인천·삼척·광주·연기·용천 등 국내,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과 장춘의 상원양행 등 국외에 곡물상점을 설립 경영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고, 그 상업 조직망을 정보·연락망으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점을 거점으로 하였던 것은 일제의 눈을 피하여 군자금 운반 등 연락이 편리하였고, 그 영업을 통하여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 친일 부호배 처단, 군자금 모집 등 의열투쟁 전개
광복회의 군자금 모금활동은 다양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세금을 탈취한 적도 있었고, 또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광을 습격하려고 계획한 일도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문에 광복회는 군자금을 주로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조차 부호들의 비협조로 성과는 매우 미흡하였다. 심지어 일본친일 부호배들은 군자금 헌납 권유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군자금 강제 모집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반입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6년 만주로 가서 권총을 구입하였고, 이를 반입하다가 서울에서 일경에 발각되어 총포화약령위반으로 피체되었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옥 후 군자금 강제 모집을 계속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반민족적 친일 부호배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먼저 선생은 부호들에게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과 배당금 통보서를 발송하고, 이를 일경에 밀고하거나 납부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은 처단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악덕지주로서 지탄을 받고 있던 경북 칠곡의 부호를 1917년 11월 10일 채기중·유창순·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처단케 하였다. 그리고 악질면장으로 지목받고 있던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을 1918년 1월 24일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하여 처단케 하였다.


8.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그러나 이 같은 활동이 알려지며 광복회의 조직이 탄로됨으로써 선생은 1918년 봄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후 선생은 재판을 거쳐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척사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신학문을 수용하여 근대적이며 혁명적인 민족의식을 확립하며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이 이끈 광복회는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대다수 민중들은 헐벗고 굶주려 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해 가는 친일 부호배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표출하였다. 광복회는 훗날 암살단·주비단·의열단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9. 민족의 선각자 박상진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각각 그들의 활동과 업적에 걸맞은 호칭이 있다. 지난 2011년 안중근 의사의 호칭을 둘러싸고 의사가 옳은가 장군이 옳은가를 따지는 논쟁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상진에게는 어떤 호칭이 적당할까? 우선은 친일파 처단 등 의열투쟁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의사라는 호칭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어머니의 장례를 모시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 나간 점에서는 열사라는 호칭도 가능할 것이다. 암흑의 1910년대에 누구보다도 일찍이 공화정을 꿈꾸었다는 사실은 선생이나 미완의 혁명가의 호칭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광복회의 총사령으로서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지휘하였기 때문에 장군이라는 호칭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박상진에게 다양한 호칭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다양한 활동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박상진은 암흑의 무단통치시기에 일점 광명이 되어 3·1운동의 원천을 형성한 선각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조동걸, 「대한광복회 연구」, 《한국사연구》43, 한국사연구회, 1983.
이성우, 「광복회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김희곤, 「1910년대 독립운동」, 『경북독립운동사』Ⅱ, 경상북도, 2012.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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