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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6월의 독립운동가 이종암
2014-11-21 17:06:34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3380

 

□ 공훈개요
◦ 성      명 : 이종암(李鍾巖)
◦ 생몰연월일 : 1896. 1. 12(음) 〜 1930. 5. 29
◦ 주요  공적
   ∙1914 대구은행에 취업
   ∙1917 예금을 빼내 만주로 망명
   ∙1919 신흥무관학교 제2기로 졸업
   ∙1919 의열단 창립(부단장)
   ∙1922 상해 황포탄 의거(다나카 대장 처단)
   ∙1925 경북 의열단사건으로 체포됨
   ∙1926 징역 13년형 선고받음
   ∙1930 대전형무소에서 병환으로 풀려났으나, 5월 순국함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 공훈설명

1. 출생과 성장과 입지(立志)
대구·경북이 낳은 의열투쟁 의사로서 대표적 인물로 손꼽아 마땅한 이종암은 1896년 1월 12일(음), 대구부(府) 대구군 해북촌면(뒤에 가서 경북 달성군 공산면이다가, 현재는 대구시 동구 공산동으로 편제되었음)의 백안동에서 태어났다. 하빈이씨 석능(石能)과 남원양씨의 차남으로였다.
본명은 종순(鍾淳)이었는데, 형과 누이들의 조사(早死)로 인해 귀한 자식이 되었기에, “바위 같이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진 아명(兒名)이 종암이었다. 독립운동기에는 외가 성을 따서, 양건호(梁建浩)·양주평(梁州平)·양근오(梁槿吾) 등의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1912년의 임인홍수(壬寅洪水) 직후 대구부 서상동(西上洞)으로 이사하여,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를 다니다 1년 만에 중퇴하였다. 그 후 들어간 부산상업학교도 학비 조달이 어려워 곧 그만두었다.
1914년 고모부 정재학(鄭在學)의 후견에 의해 대구은행에 입행한 그는 1년 후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하고, 서희안(徐喜安)을 반려로 맞아 결혼하였다.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조달을 위한 1916년 9월의 ‘대구권총사건’과 1917년 11월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 처단사건은 이종암의 마음에 적지 않은 울림을 남겼다.
1917년 12월의 어느 토요일, 마감 직전 입금된 1만 9백여 원을 빼돌려 갖고서 즉시 잠적한 이종암은 친우 신상태(申相泰)의 주선으로 칠곡군 약목의 한 민가에 은신해 있다가, 3개월 후 중국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미국 유학을 위해서였다.


2. 신흥무관학교 수학 후 의열단 창립에 참여
상해행 도중에 만주 봉천(奉天)에서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자 구영필(具榮珌)을 만나게 된 이종암은 그의 설득과 권유로 미국 유학의 뜻을 접고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휴대금 중 7천원을 구영필에게 주어서, 무역상 겸 연락기관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봉천에 설립하여 경영토록 위탁하였다.
그리고는 1918년 4월에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가서 신흥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듬해 5월에 신흥중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면서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분교를 내자, 이종암은 그리로 옮겨가 제2기로 졸업하였다. 거기서 그는 동지 규합차 길림(吉林)에서 온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대로 여러 동창생들과 함께 길림으로 갔다.
길림에서 이종암은 동지 청년들과 함께 황상규(黃尙奎) 등 선배급 운동자들의 지도를 받아 새로운 독립운동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19년 11월 10일, 항일 국내작탄투쟁의 선도적 행동대가 될 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이 창립되었다. 당연히 이종암은 13인 창립단원 중 1인이 되었다. 대구 출신의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서상락(徐相洛), 고령 출신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신철휴(申喆休)도 창단 동지였다.
의열단은 일제 식민지통치의 핵심기관들에 투탄하여 파괴하고 그 수뇌급 요인들과 악질적 민족반역자들을 암살로써 제거·응징·숙청함을 당면 활동목표로 삼았다. 총독정치의 사령탑(‘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과 친일반역자 무리(‘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적 토호열신’)를 ‘가살’(可殺) 대상으로 규정했고, 식민지 지배의 중추기관들(정치기관·수탈기구·선전기관·폭압기구)을 모조리 파괴하려 하였다.


3. 의열단의 항일거사들을 주도하고 계속해서 참여
위와 같은 목표 아래 의열단이 처음 기획하여 추진한 것이 국내 적기관 총공격 거사였다. 구체적 목표물은 경성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종로경찰서 등이었다. 그리하여 창립단원 전원의 일심협력과 참여로 거사준비 작업이 개시되었다. 김원봉 등이 상해로 가서 폭탄 13개 제조용으로 구입한 폭약과 부속재료들, 직접 제조한 폭탄 3개, 권총 2정, 탄환 100발이 2차에 걸쳐 양곡 화물 속에 숨겨져서 부산까지 밀송되었고, 경남 진영과 밀양의 단원 집에 나누어 보관시켜졌다.
이때, 이종암의 휴대금 잔액 3천여 원이 제공되어, 상해행 여비와 폭탄 구입비로 쓰여졌다. 단원들은 단장 김원봉 등 3인만 제외하고 전원이 국내로 잠입하여 분산, 잠복해 있으면서 후속 준비작업에 임하였다. 이종암은 황상규·윤치형(尹治衡)과 함께 연락 및 자금조달 임무를 맡았다.
거사 결행 시점은 6월초로 잡혀 있다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7월 10일경으로 늦추어졌다. 그러던 중 6월 16일 서울 인사동에서 황상규 등 6명 단원이 밀정 김진규(金珍奎)의 제보를 받은 경기도 경찰부 김태석(金泰錫) 경부와 그 부하들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부산·마산에서도 다른 단원과 협력자 거의 모두가 연이어 검거되어갔고, 숨겨둔 폭탄과 폭약, 탄환 등도 은닉처가 드러나 죄다 압수되고 말았다. 이종암은 다행히 다른 동지 4명과 함께 신속한 도피에 성공하여 검거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잠행하던 이종암은 밀양 출신 단원 김상윤(金相潤)과 함께 후자의 친우인 최수봉(崔壽鳳)을 은밀히 만나서, 밀양경찰서 투탄거사 실행의 결심을 얻어냈다. 동향인 청년지사 고인덕(高仁德)이 제조해준 폭탄 2개를 건네받은 최수봉은 1920년 12월 27일 아침 9시 반경에 조회 중인 밀양경찰서 구내로 진입하여 사무실 내부로 폭탄을 던졌다. 그 중 제2탄이 큰 폭음과 함께 터져서 청사 일부를 파괴하였다. 이 거사는 앞서 9월에 김원봉의 지시에 의해 단원 박재혁(朴載爀)이 감행한 부산경찰서 작탄 및 서장폭살 의거와 더불어 영남 일대의 민심을 격동시켰고, 경찰 당국을 전전긍긍케 하였다.
최수봉 의거를 추동한 후 김한(金翰) 등의 도움으로 서울에 은신해 있던 이종암은 12월에 중국으로 탈출하여, 단 본부가 새로 두어진 곳인 북경(北京)으로 가서 합류하였다. 그 후 이종암은 의열단이 기획 감행한 1922년 3월의 상해 황포탄(黃浦灘) 의거 때, 일제 군부의 거물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 암살의 실행요원이 됨을 극구 자원하여 제3선 저격수로 나섰다. 그러나 불행히도 총탄이 빗맞고 폭탄은 불발하여, 다나카 포살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종암은 현장에서 즉시 피신하여 체포되지 않았으나, 다른 저격요원인 오성륜(吳成崙)과 김익상(金益相)은 경찰에 쫓기어 피체되고 말았다.
그 후 진행된 단 조직 정비 및 개편 때 이종암은 핵심 간부진인 5인 참모부(‘기밀부’)의 일원이 되었다. 1922년 여름부터 의열단은 제2차 국내 적기관 및 요인 총공격 계획을 세우고 다각도로 준비하여, 마침내 폭탄 36개, 권총 5정, 실탄 155발의 국내 밀반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923년 3월 중 결행 예정이던 거사는 일제 당국의 간교한 밀정 운용과 파괴공작으로 인하여 국내잠입 단원 전원 피체라는 결과를 남긴 채 실행 직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이 의열단 명의로 발표되어 큰 호응을 얻었고, 그 후로 단의 위세가 급속 신장하였다. 앞서의 제2차 암살파괴계획의 실패를 딛고서 의열단은 1923년 여름부터 남만주-서울-도쿄 3각 연계의 대규모 광역거사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천황’을 포함한 일제 수뇌와 식민지통치의 심장부를 같이 겨냥하는 특공거사인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열단 본부에서는 단원들을 일본으로 특파하고, 폭탄 50개를 도쿄로 이송할 준비도 진행시켰다. 하지만 9월 1일의 ‘간토오(關東) 대지진’ 발생 이후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의 참극 와중에 도쿄특파 단원 다수도 무더기로 피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열단 간부진은 특공거사 계획을 일부 수정하되 계속 추진키로 방침을 정하고,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의 연기된 결혼식이 거행될 1924년 1월경에 폭탄 300개를 갖고서 도쿄거사를 단행키로 하였다. 이를 위해 필요한 최소 3만원 예산의 비용은 자체 조달키로 하고, 단원들을 국내로 들여보내 부호들에게서 거두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선발되는 11명의 특파원 대오에 이종암도 ‘양건호’라는 이름으로 가담하였다. 하지만 먼저 입국한 김정현(金禎顯)과 구여순(具汝淳)이 밀정의 사전 제보로 인해 즉시 체포되고 말아서, 그 후의 단원 특파는 속행되지 못하였다.


4. 도쿄의거 결행 노력과 ‘경북 의열단사건’
위와 같은 경위로 2차 예정기일도 넘긴 채 유예되어버린 광역 특공거사 계획은 그러나 1924년 들어서도 아주 포기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상반기까지는 꾸준히 추진되었다. 하지만 그 해 하반기 이후로 의열단의 투쟁동력은 상당히 감퇴되었다. 자금난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암살파괴운동 노선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자들로부터 가해져 왔다. 설상가상격인 그런 상태는 1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 동안에 이종암은 각기병 치료차 길림성 영안현(寧安縣)의 동경성(東京城)으로 가서 영고탑(寧古塔)에 재류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발분하여, 폭탄 2개, 권총 1정, 탄환 50발, 「조선혁명선언」 인쇄문 100매를 휴대하고 영고탑을 떠나 1925년 7월에 단신 밀입국하였다. 1만원의 자금만 마련되면, 연전에 동지 김지섭(金祉燮)이 그랬던 것처럼, 혼자 도쿄로 직행하여 폭탄거사를 감행키로 결심하고, 소요 자금을 직접 나서서 조달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그로서는 1918년 초의 중국 망명 이후로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일 것임이 예감되는 국내 잠입이었다.
입국 즉시 그는 밀양으로 가서, 고인덕 등 의열단 동지들을 만나 자금조달 방안을 상의했다. 그 결과, 예전처럼 총기로 위협하거나 문서를 보내어 의연금을 강제하는 것은 효과가 약하고 쉽게 발각될 우려가 있으니, 온건한 방법을 쓰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이종암은 마산의 동지 배중세(裵重世) 소유의 수리사업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경남은행 구포지점장인 동지 김재수(金在洙)로부터 5천원을, 경북 포항의 어장(漁場) 투자금 명목으로 경남 하동의 박종원(朴宗源)으로부터 5천원을, 각각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각기병 요양을 겸하여, 경북 달성군 노곡동의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 은신하였다.
그런데 이런 동향이 밀정에게 포착되어버렸고, 제보를 받은 경북경찰부 고등과장 나리도미(成富文吾) 경부의 급습으로 이종암은 11월 5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만났거나 연락했던 이들도 11명 전원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일제 관헌은 이 사건을 경남·북 지방의 의열단 조직세를 압박하는 호기로 삼으려 하여, 집요한 신문과 혹독한 고문이 만 1년 동안 피의자들에게 수시로 가해졌다. 결국은 4명 기소로 예심이 종결된 1926년 11월에야 당국은 사건 전모를 공개하였고, 언론은 ‘경북 의열단사건’이라고 이름 붙여 크게 다루었다.


5. 옥고와 순국
법정에서 이종암은 태연하고도 당당한 자세로 신문에 응대하였다. 재판장을 향해서는 “우리 조선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불가불 혁명을 할 수밖에 없지 않소!”라고 질타하였다. 선고 공판에서 이종암은 그 동안의 항일운동 행적이 모두 가중되어 1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며 옥고를 겪던 이종암은 위장병·폐병·인후병 증세가 겹쳐서 매우 악화된 때인 1930년 5월에 가출옥하였다. 피체 구금 후 4년 6개월 만에 너무 위중해진 상태가 되어서야 석방된 그는 결국 열흘 후인 5월 29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간고한 투쟁의 생애를 35세를 일기로 마감하고 순국한 것이었다.
정부는 그의 거룩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이종범,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전』, 광복회, 1970.
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김영범, 『의열투쟁 Ⅰ―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이동언, 「이종암의 생애와 의열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2, 2012.
김영범, 「경북인의 국내 의열투쟁」, 『경북독립운동사』Ⅴ, 경상북도, 2014.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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