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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5월의 독립운동가 류림
2014-11-21 17:05:58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1838

 

□ 공훈개요
◦ 성      명 : 류림(柳林)
◦ 생몰연월일 : 1894. 5. 23 〜 1961. 4. 1
◦ 주요  공적
   ∙1911 안동 협동학교 제1회 졸업
   ∙1919 안동 임동면 3·1운동 참가 후 만주망명
   ∙1922 중국 성도대학 입학하여 아나키즘 이론 습득
   ∙1929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
   ∙1942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1944 임시정부 국무위원
   ∙1945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환국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 공훈설명

1. 성장기에 벌인 국내활동
3·1독립선언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사회주의가 들어오고, 뒤를 이어 ‘무정부주의’라는 이름으로 아나키즘(Anarchism)이 등장하였다. 민족독립을 꿈꾸던 인물들은 다투어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여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다. 아나키즘은 어떠한 권력도 거부하는 절대 자율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자율사회를 가로막는 절대 권력체이므로 이를 부수어 민족독립을 일구어내려던 것이 아나키스트들이 내세운 목표였다. 여기에 신채호·이회영·김종진·정화암·백정기 등이 대표적이고, 경북 출신으로 류림(柳林, 안동)·엄순봉(영양) 등이 두드러진다.
류림은 1894년 안동군 예안면 계곡동(桂谷洞)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화종(花宗)으로 불리다가 1919년 항렬에 맞추어 화영(華永)으로 개명하였다. 호를 월파(月波)·단주(旦洲)로 쓰고, 류림(柳林)·고상진(高尙眞) 등 다른 이름도 쓰였다. 이 가운데 단주 류림이라는 이름은 활동 후반기에 쓰인 것이다.
그가 집안의 가학을 잇다가 경북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1회생으로 다녔다고 알려진다. 류인식과 김동삼은 그가 독립운동가로 나서는 인생의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협동학교를 졸업하기 반 년 앞서 나라가 무너졌다. 이에 그는 손가락을 베어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고 혈서를 썼다는 이야기도 아들의 입으로 전해진다. 협동학교의 교육과 더불어 류림이 독립운동에 나서는 첫 걸음이 20대 청년 시기에 비롯된 것이다. 협동학교를 이끌던 스승들이 대거 만주로 망명한 뒤, 그는 대구와 안동을 오가면서 부흥회와 자강회 등에 참가했다고도 알려진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또 1919년 3·1독립선언 당시에는 협동학교 인사들과 임동면 전주류씨 문중이 대거 참가한 안동 임동면 챗거리(편항鞭巷) 장터 시위에 그가 참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바로 그 뒤에 그는 모친과 아내, 만 네 살이 된 아들과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2. 1차 망명과 아나키스트의 길
그는 이상룡과 김동삼을 비롯한 안동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터를 잡고 있던 남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갔다. 서로군정서에 잠시 몸을 담았던 그는 1920년 여름 활동무대를 중국 본토지역으로 옮겼다.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당에 들고, 1921년에는 북경에서 신채호가 펴내던 잡지 《천고(天鼓)》 발행을 도왔다. 이 무렵 그는 아나키즘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섰다.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는 학문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사천성 성도(成都)의 성도대학(成都大學) 사범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사상적으로도 성숙하여 상당한 이론으로 무장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1926년 초 성도대학을 졸업한 그는 상해로 돌아왔다.
1927년 길림에서 아나키스트 김종진을 만난 그는 함께 해림(海林)으로 가서 신민부 최고 지도자인 김좌진과 합류하였다. 류림은 김좌진에게 아나키즘이 독립운동에 꼭 필요한 이론임을 강조하였다. 당시 팽창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김좌진이 공산주의를 일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그는 단호하게 그것을 부정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몇 차례 격론이 벌어지다가 끝내 단주는 길림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김좌진과의 논쟁에서 일단 합의점 도출에 실패한 그는 정의부가 있던 길림성 화전현(華甸縣)으로 돌아 왔다. 이때부터 그는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1929년 11월 평양으로 몰래 들어와 국내 활동가들과 더불어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이 연맹은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한다는 강령으로 일제 타도의 의지를 표명하고, 또 자유연합에 기초한 무정부주의 사회 건설 의지를 밝혔다. 바로 뒤에 그는 일경에 붙잡혔지만, 특별한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 덕분에 처벌은 만주 거주지로 쫓겨나는 정도로 그쳤다.
마침 광주학생항일투쟁이 일어나고, 많은 학생들이 만주로 탈출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의성숙(義誠塾)이란 학교를 세워 이들을 받아들였다. 1931년 일경에 다시 붙잡힐 때까지 그는 4백 명이나 되는 학생을 가르쳐 중국학교에 입학하도록 도왔다. 의성숙을 세우고 운영한 것은 단순한 교육이나 유학알선이 아니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비밀 합의 사항인 인재양성을 실천한 활동이었다.
의성숙 운영에 몰두하던 그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한 보름 뒤인 1931년 10월 초에 일경에 붙잡혔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 존재가 일제 정보망에 드러난 때문이다. 2년 동안이나 미결수로 고생하던 그는 1933년에 가서야 비로소 ‘원산흑색사건’이란 이름으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37년 10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치렀으니, 실제로는 6년 동안이나 갇혀 지낸 것이다.


3. 2차 망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감옥을 나서자마자 그는 2차 망명길에 올랐다. 북경과 천진 일대에서 움직이던 그는 연안을 거쳐 1942년 중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았다. 그가 옥살이하던 동안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공산주의 세력이 항일투쟁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고, 게다가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 좌우합작까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도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양대 축이 형성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와 달리 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위상과 활약은 미미하기만 했다. 그가 연안을 찾은 것이나 중경으로 이동한 것은 당시 항일투쟁의 중심지를 방문한 것이고, 마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 한인아나키스트들이 참가하고 있던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뒷날 그는 자신이 참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기미운동 때에 민족의 총의로 출발한 임시정부”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1942년 10월 김원봉·김상덕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대한민국 국회 전신)에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뽑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이룬 통합정부를 달성한 시절이었다. 여기에 그는 아나키스트 정당인 조선혁명자연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이라는 그의 평가는 아나키스트로서 정부 조직에 참가한 이유를 말해준다. 그는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였고, 1944년부터 귀국할 때까지 국무위원(무임소)이 되었다. 또 열강이 전쟁 뒤에 한국을 국제 감시(공관통치·신탁통치) 아래 둔다는 소식에 맞서 중경에서 재중국자유한인대회가 열리자,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성토에 나섰다. 따라서 귀국한 뒤 신탁통치 소식에 극력 반대하고 나선 것도 중경에서 펼친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환할 때 제2진에 속하여 12월 1일 조국으로 돌아왔다.


4. 마무리
류림의 일생은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3·1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한 그는 신채호의 영향을 받으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이념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성도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만주로 김좌진을 찾아 아나키즘을 접목시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내로 눈길을 돌렸다. 그 열매가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었다. 자신이 맡은 임무인 인재양성을 실천에 옮긴 것이 의성숙 경영이었다. 그러다가 일경에 붙잡혀 6년 동안 옥고를 치른 그가 다시 망명길에 오른 뒤에는 중경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야말로 민족의 절대 자율을 추구하는 조직이라고 평가하고서 ‘무정부주의자’를 대표하여 여기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펼쳐나간 것이다.
환국한 뒤 그는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적 통일민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노농신문》을 창간하여 노동자와 농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아나키스트로서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다시 그 이론으로 자주통일정부 수립과 노농대중을 위해 살던 그는 1961년 4월 1일 만 67세로 삶을 마감하고, 서울 수유리 독립운동가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단주류림선생기념사업회, 『단주 류림 자료집』 1, 1991.
김희곤, 「단주 류림의 독립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8집, 한국근현대사연구회, 2001.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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