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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4월의 독립운동가 김만수
2014-11-21 17:05:33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1938

 

□ 공훈개요
◦ 성      명 : 김만수(金萬秀)
◦ 생몰연월일 : 1894. 11. 15 〜 1924. 4. 9
◦ 주요  공적
   ∙1913 만주망명
   ∙1918 이상룡이 세운 병영, 길남장에 참여
   ∙1922 서로군정서 헌병대원으로 활동
   ∙1923 건국청년모험단 결성
   ∙1924 하얼빈에서 격전을 치르다 순국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 공훈설명
1924년 4월 9일, 만주 하얼빈 밖 남십팔도가(南十八道街)의 어느 중국인 가옥에서 일본총영사관 습격 및 악질 경찰간부 암살을 추진 중이던 청년지사 김만수(金萬秀)와 동지 최병호(崔炳鎬)‧류기동(柳基東) 3인이 일경 및 중국군경 2백여 명에 포위된 후 장시간 대치하며 총격전을 벌이다 장렬한 죽음으로 순국하였다.

김만수는 1894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김낙운(金洛雲)과 분성(盆城) 이씨 슬하에 태어났고, 자(字)를 회일(會一)이라 하였다.
당시의 오미동은 풍산 김씨 집안이 5백년을 이어온 전통마을이었고, 대대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소였다.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민족운동가인 김응섭(金應燮, 1878년생), 김지섭(金祉燮, 1884년생), 김재봉(金在鳳, 1891년생)도 그 반열의 뒤를 잇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일문 친족이면서 선배 지사들이던 이들 세 사람의 훈도를 받고 자란 김만수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몹시 비분강개하였다. 그리고는 일제 침략과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내심의 강고한 결의를 다진 그는 하나의 필연적인 선택처럼 1913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앞서 1911년 초에 석주 이상룡(李相龍), 백하 김대락(金大洛), 일송 김동삼(金東三)을 위시한 안동 출신의 다수 지사들이 집단적으로 기획망명을 결행한 바와 같은 궤적의 것이었다.

1918년 봄에 이상룡이 화전현(樺甸縣)에 길남장(吉南庄; 길림 남쪽의 농장이란 뜻)을 설치하였다. 20세 이상의 장정들을 농병(農兵)으로 삼아서, 반나절은 농사짓고 반나절은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둔전 형태의 병영이었다.
이에 김만수도 선뜻 모집에 응하여 군사가 되어서 이상룡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 이상룡이 보건대 김만수는 “키는 작으나 꼼꼼하고 날쌔며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길남장에서 몇 달을 지낸 후 김만수는 이상룡 곁을 떠났다가 1919년 가을에 다시 찾아갔다. 그 해 4월 유하현(柳河縣)에서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설치된 군정부(軍政府)가 얼마 후 임시정부 산하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정리되면서 본부를 화전으로 옮길 무렵이었다. 군정서의 최고 지도자인 독판(督辦)은 이상룡, 참모장은 김동삼이었다.

1922년 서로군정서에 군자금 모금을 전관(專管)할 기관으로 헌병대가 조직되었다. 그러자 김만수는 헌병대원이 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 헌병대원으로 들어온 최병호와 막역한 동지가 되었다. 강원도 출신인 최병호는 유년기에 부모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서 통화(通化)의 소학교를 졸업하였고, 3‧1운동이 발발함에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벌여온 터였다.
그 무렵,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의 고등정탐부장인 구니요시 세이호(國吉精保) 경부보(警部補)와 형사부장 마쓰시마(松島)가 장춘(長春)과 하얼빈(哈爾濱) 일대의 한인들을 무단히 탄압하고 함부로 해쳐서 악명이 높았다. 이에 김만수와 최병호는 총영사관을 습격하여 쿠니요시 등을 암살 응징키로 결의하고, 동지 10여 명을 모아서 건국청년모험단(建國靑年冒險團)을 결성하였다.

1923년 12월 초에 두 사람은 하얼빈으로 파견되어, 남십팔도가의 어느 중국인 집에 방 한 칸의 거처를 정하고 거사 기회를 엿보았다. 1924년 4월 초에는 길 가다 우연히 재회한 김만수의 친구 류기동이 거사 대오에 즉시 합류하였다. 평안북도 출신인 류기동은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무송현(撫松縣)에서 흥업단(興業團)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1922년 길남장이 있는 화전으로 옮겨갔을 때 김만수와 알게 되어 친교했던 것이다(류기동이 안동군 임동면 수곡[무실] 출신인 류동범[柳東範]과 동일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던 차에 이들의 거사계획과 동향이 일경의 정보망에 탐지되고 말았다. 총영사의 명을 받은 쿠니요시는 4월 7일 밤 12시경에 9명의 순사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김만수 등의 거처를 포위하였다.
게다가 일본 총영사의 압력을 물리치지 못한 하얼빈도(道) 교섭서(交涉署)의 교섭원 차이윈성(蔡運升)의 요구로 빈강진수사(濱江鎭守使) 장짜오탕(張召棠)이 보낸 중국군 보‧기병(步‧騎兵) 각 1개 중대와, 경청(警廳) 특경대장 장쩐동(張鎭東)과 예하 2개 경무서 서장이 직접 인솔하고 출동한 40명의 경관대가 합세하여, 겹겹이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그 상태에서 장쩐동이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 김만수 등 3인에게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고 물었다. 이에 김만수는, “우리는 살인‧강도하는 토비(土匪)가 아니라 한국독립군의 일원인데, 임무는 비밀이라서 밝혀 말할 수가 없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적과 사생결단의 승부를 겨루고자 할 뿐, 중국 군민(軍民)을 해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요지로 답변하였다. 그러자 장진동이 “그렇다면 당신들은 국사범(國事犯)이니, 조용히 잡혀주면 국사범으로 대우할 것이고, 결코 일본에 인도하지 않겠노라”고 회유하였다. 하지만 김만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냥 물러가주기를 요청하였다.

대화를 끝내고 김만수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는데, 구니요시가 순사 2명을 데리고 총을 빼들며 쳐들어왔다. 순간적으로 김만수의 권총이 불을 뿜었고, 구니요시가 가슴을 관통 당해 즉사하였다. 그러자 일경대는 재빨리 퇴각하여 숨었고, 일본 총영사는 1인당 3백 원씩의 현상금을 걸고 적극 진압을 유도하였다. 이에 중국 군경이 저녁 무렵에 5백여 발의 총탄을 난사하는 등 공세를 취하니, 안에서도 권총으로 응사하여, 날이 밝을 때까지 장시간 대치가 계속되었다.

이튿날인 4월 9일 오후 1시경, 중경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부수어 구멍을 내고 5~6개의 폭탄을 투척함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탄을 퍼부었다. 그로 인해 벽채가 무너졌고, 5분 정도 상호 총격이 계속되던 끝에 총성이 끊어졌다.
일경과 중경들이 일제히 진입해 살펴보니, 처참한 모습의 시신 주위로 유혈이 낭자하고, 권총 2정과 3발의 탄환만 남아있었다. 3인 모두 가슴 한가운데에 총탄 자국이 나 있어서, 누가 봐도 자결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최병호와 류기동은 명함을 지니고 있었고, 김만수는 왼쪽 팔뚝과 다리에 먹으로 이름과 출생연도가 새겨져 있어서, 신원이 겨우 확인되었다. 3의사의 시신은 하얼빈 십자회(十字會)에서 수습하여, 한인 공동묘지에 매장해 주었다.

이 사건은 중국 신문들에 크게 보도되었고, 안중근의 의거처럼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하얼빈 각 단체는 일본영사관측이 국제공법 위배 및 주권침해 행위를 자행한 데 매우 분개하여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교섭서가 일본영사관에 엄중 항의할 것도 단체연합회 명의로 요구하였다.

김만수와 수차 대면‧대화하면서 그의 사람됨이 남다름을 알아보았던 이상룡은 이 3의사의 죽음이 ‘살신성인’의 의미를 띤 것이었다고 평설하고, “의(義)란 마땅함[宜]이다. 마땅히 없애야 할 것을 없앴다면 그 공로를 따지지 않고, 마땅히 죽어야 할 곳이라면 죽더라도 그 뜻을 바꾸지 않는 것, 이것이 의사일 것이다”라고 추기하였다. 이상룡의 말대로 김만수와 그의 두 동지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용맹무쌍하게 맞서다 일신을 민족 독립과 자유의 제단에 바치는 진정한 의사의 길을 취했던 것이다.

김만수 등 3의사의 영용한 혈전의 공훈을 기리고자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문헌
『독립신문』 제174호(1924년 4월 26일자).
이상룡, 「삼의사 합전」, 『국역 석주유고』(상), 경인문화사, 2008.
일본 외무성, 『불령단 관계 잡건—조선인의 부—재만주의 부』.
애국동지원호회, 『한국독립운동사』, 1956.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김영범, 『의열투쟁Ⅰ—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희곤‧강윤정, 『오미마을 사람들의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09.
김희곤, 『안동 사람들이 만주에서 펼친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11.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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