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US 사이트맵


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14. 1월의 독립운동가 류시연
2014-11-21 17:02:11
학예연구부 한준호 <> 조회수 2123

 

 □ 공훈개요
◦ 성      명 : 성남(星南) 류시연(柳時淵)
◦ 생몰연월일 : 1872. 〜 1914. 1. 29. 
◦ 주요  공적
   ∙1896 안동의진 소모장·선봉장
   ∙1906 류시연의진 결성, 경주 열읍 의병 대표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 
   ∙1908 안동군 임동면 수곡리 대전에서 일본군에게 대패 
   ∙1911 만주 망명
   ∙1912 군자금 조달 목적 국내 잠입 활동
   ∙1913 경북 영주에서 피체
   ∙1914 대구감옥에서 사형 순국
◦ 훈      격
   ∙건국훈장 독립장(1962년)

□ 공훈설명
◇ 류시연의 가계와 성장
◦류시연은 1872년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 박곡리에서 柳正鎬와 咸安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호는 星南이다. 이름은 時榮ㆍ時宗 등으로도 불리었으나 호적상의 이름은 承一이다. 그는 어렸을 때 大坪學熟에서 삼종형 柳淵覺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전주류씨 수곡파 가문은 일찍부터 경학과 예학을 숭상하여 岐陽書堂, 東巖亭, 晩愚亭 등을 통해 가학을 발전시켜 왔다.  
◦류시연이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안동지역에서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맞서는 嶺南萬人疏 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柳致明의 문인들을 비롯한 전주류씨 수곡파 인물들이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모습들은 류시연이 의병항쟁을 펼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영양의병장 金道鉉과도 관계가 깊다. 그들은 혼반으로 묶여져 있었을 뿐 아니라 둘 다 삶 자체가 일제에 대한 항쟁이었다. 혼반에서는 김도현의 종고모가 수곡으로 출가하였고, 나중에는 딸과 질녀가 수곡으로 시집을 왔다.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에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柳義士傳」에서 잘 나타난다.

◇ 안동의진 참여
◦1896년 1월 權世淵을 대장으로 안동의진이 결성되었다. 안동의진은 안동부를 장악하였으나 대구 관군을 앞세운 관찰사 김석중의 공격으로 1월 30일 안동부를 내어주고 말았다. 이때 관군이 주민들을 강제로 단발을 시켰는데, 류치명의 아들 柳止浩 등이 관군에게 잡혀가 욕을 당하였다. 권세연은 의진을 수습하여 1896년 2월 25일, 다시 안동부를 탈환하였다. 류시연도 이때부터 안동의진에서 의병항쟁을 시작하였다. 그는 소모장으로 안동 주변 지역을 돌며 의병모집과 군기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 류시연은 1896년 3월 30일 안동의진의 선봉장 직책을 맡았다. 이는 권세연에 이어 金道和가 새롭게 대장직에 오르면서 지휘부가 재편되던 때였다. 안동의진은 예천으로 이동하여 3월 29일, 풍기ㆍ순흥ㆍ영주ㆍ봉화ㆍ선성ㆍ호서의진 등과 연합하여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크게 패한 반면, 승세를 틈탄 일본군은 안동 송천까지 추격해 와서 안동부를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류시연이 태봉전투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안동의진이 태봉전투 패전과 안동부 방화로 고초를 겪자 류시연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에서 남하 중이던 김하락의진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김하락이 영덕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연합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봉전투 이후 영양과 영덕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도현의진과도 연합을 시도하였지만 성립되지 않았다. 
◦안동의진은 군자금의 압박과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 및 한 여름의 장마로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웠다. 게다가 8월에 이르러 영남지역 의병의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勅令’으로 각 지역 의진들이 거의 해산하는 형편이었다. 안동의진도 해산하고 류시연도 결국 고향인 임동 수곡으로 돌아와 재기를 준비하였다.

◇ 류시연의진의 결성
◦ 1905년 을사늑약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류시연도 영남 각지를 돌면서 창의를 독려하고, 자신도 의진을 결성하여 1908년 여름까지 안동 임동을 주무대로 경북북부와 동부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1906년 봄, 경주 분황사에서 열읍 의병 대표자의 모임에서 그가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주목받을 대목이다.   
◦ 류시연의진은 결성 이후 진보ㆍ영덕 등지에서 항쟁을 펼쳤다. 그러나 1906년 6월 대구 관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이후 안동지역으로 옮겨와 1907년 2월부터 1908년 1월까지 봉화ㆍ예안ㆍ안동ㆍ진보 등지에서 일본군과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 때 안동 임동 대곡 출신으로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예안ㆍ안동ㆍ진보ㆍ영양 등지에서 활동하던 박처사와도 관련을 갖는데, 박처사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 1908년 1월 이후 류시연의 활동은 주로 영양군 일월산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월산으로 근거지를 옮겨온 신돌석의진과 연합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월산 항쟁은 2월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신돌석의진 등과 연합하면서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두 차례에 걸쳐 무력화시켰다. 당시 일본군 수비대는 류시연ㆍ신돌석ㆍ김성운 등을 생포하기 위한 토벌대를 편성하고, 북으로 봉화에서 남으로 예안까지 남북으로 길게 포위망을 치고 일월산으로 압박해 갔다. 
◦ 일본군의 포위망이 일월산에 이르면서 영양군 수비면ㆍ청초면ㆍ북초면 등지에서는 토벌대와 의병간의 전투가 극에 달하였다. 하지만 류시연을 비롯한 신돌석ㆍ김성운 등은 토벌대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류시연은 토벌대의 포위망이 좁혀져오는 것을 간파하고 의진을 나누어 영양군 서남방면으로 빠져나갔다. 의병진들이 토벌대의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겨울이라는 계절 및 산악지역이라는 자연 조건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 류시연의진은 일본군의 집중 토벌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의진의 피해도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08년 2월 28일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 大田 부근의 사찰에서 의병 43명을 잃게 되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 의진도 흩어졌다. 또 이 시기에 발표된 ‘귀순법’도 의병 이탈자를 가중시켰다. 귀순자명단에서 류시연의진으로 확인된 귀순자도 8명이나 된다.

◇ 만주 왕래와 군자금 모집
◦ 1908년 2월 임동 수곡에서 패한 이후 류시연의 의병 활동도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시연은 이후 만주 망명을 준비한 것 같다. 그가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안동출신 인사들의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고 있던 유하현 삼원보였다. 류시연은 1911년 8월 만주에 도착한 후, 이상룡·김동삼 등을 찾아가 군사훈련과 무기구입 등에 대해 의논하고 만주일대를 둘러보았다. 
◦ 당시 이곳에는 경학사가 조직되어 있었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가 설치되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런데 경학사가 재정난을 겪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요 인사들은 국내 자신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물자와 재원을 공급하였다. 류시연도 1912년 군자금 및 무기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1913년 5월 경북 영주의 반구시장에서 밀정의 신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 류시연은 1913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914년 1월 29일 대구감옥에서 18년 동안의 항일투쟁을 순국으로 마감하였다.

□ 참고문헌
• 조박용, 「조박용약기」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의병항쟁재판기록), 1973.
• 한준호, 「안동출신 의병장 류시연(1872~1914) 연구」.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권대웅·권영배, 『경북독립운동사』 Ⅰ, 경상북도, 2012.
• 권영배, 『안동지역 의병장 열전』, 지식산업사, 2012.

*담당부서 및 담당자:학예연구부 한준호/이메일:pantagom@hanmail.net/연락처:054-823-1555(FAX.054-823-1550)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  |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   독립기념관 독도학교

기념관 소개  |   찾아오시는 길  |   관리자

주소 : (36730)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독립기념관길 2      전화 : 054-820-2600      팩스 : 054-820-2609
사업자등록번호  508-82-12608  대표자 김장주 
COPYRIGHTⓒ2014 BY (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ALL RIGHTS RESERVED